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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Jan 11. 2019

이야기로 거리를 줄이다

아이들은 나와의 등, 하교 길을 싫어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의 학교와 어린이집은 걸어서 15~20분 거리에 있었다. 아내와 내가 번갈아가며 데려다주고 데려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들이 “왜 엄마가 데려다주지 않아요?”, “왜 엄마가 오지 않았어요?”라면서 나보다 아내를 원하기 시작했다.      


 독일 생활을 시작한 이후 아내와 나는 둘 다 시간적 여유가 많았으므로 거의 모든 일들을 함께 하거나 공평하게 나누었다. 자동차로 20분이 걸렸던 예전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등, 하원 시킬 때도 항상 함께 했고, 대학 도서관이나 어학원에 가는 것도 함께 했다. 혼자만 볼 일이 있더라도 같이 집을 나서서 잠시 따로따로 흩어졌다가 점심시간에 다시 만나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가사와 육아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내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아내는 아이들과 놀고, 다음날은 반대로 했다. 하지만 점차 각자가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아내는 요리와 빨래 등의 가사를 주로 담당했고, 나는 첫째 아이와 한글 공부를 하거나 둘째와 축구를 하는 등 육아와 놀이를 주로 맡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있으면 아이들은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언제나 엄마인 아내보다는 아빠인 나에게 치대면서 놀아달라고 졸라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학교와 어린이집에 가는 것을 더 원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몇 번을 물어보았다.

 “아빠가 오는 건 별로 안 좋아?”

 아이들의 대답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이었다.

 “아빠가 오는 것도 좋지만 엄마가 오는 게 더 좋아.”     


 짐작되는 이유가 있기는 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은 아시아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긴 하지만 동양인 남자가 아이들을 등, 하교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내가 학교나 어린이집에 가면 심하게 눈에 띄었다. 반면 중국이나 일본, 태국 등 동양인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는 제법 있었다. 또한 나는 외출할 때 두꺼운 잠바 하나만 걸쳤는데, 아내는 조금이라도 꾸미고 다녔다. 아이들 역시 이런 점을 은근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둘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가 오는 게 예뻐서 좋아요.” 

 학교나 어린이집에서 마주치는 친구들의 부모에게 아내가 나보다 더 싹싹하게 잘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데려다주거나 데리러 가면, 오가는 길의 절반쯤은 왜 엄마가 안 왔느냐면서 투덜거리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학교와 어린이집에 가는 것은 아내가 전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잠시 하게 되었다.   

  

 아이들과의 등, 하굣길에는 그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할 만한 게 변변치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학교나 어린이집 생활이 어땠는지, 오늘은 무얼 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맨날 그런 얘기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았다는 둥, 학교나 어린이집에서 괴롭히는 친구가 있었다는 둥의 이야기를 한다면 대환영이지만 아이들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먼저 그런 것들을 묻는 것은 괜히 취조하는 느낌이 들어서 내키지 않았다. 첫째의 학교까지 가는데 15분이고 둘째의 어린이집까지 가면 5분이 더 걸렸다. 거리로는 1.5km가 조금 넘었는데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가기에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걷는 그 1.5km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다.     


 해결책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아이들은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것을 좋아했는데, 첫째가 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오후 8시면 잠자리에 들다 보니(독일 아이들은 보통 7-8시, 늦어도 9시 전에는 잠자리에 든다) 책을 많이 읽어주지 못했다. 안 그래도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라 아침에 집을 나서는 길에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선녀와 나무꾼>이었다. 이 이야기를 한 것은 그때쯤 우연히 어디선가 <선녀와 나무꾼>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관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선녀와 나무꾼> 들려주면서 누가 잘못한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훔칠 것을 교사한 노루를 비난했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예상외로 흥미진진했다. 아이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등교했고, 우리는 어느새 학교와 어린이집에 도착해 있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didtjsgml50/20201096137

 이야기를 들려줘 본 사람은 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책을 읽어주는 것과는 많은 점이 다르다. 이야기는 말할 때마다 세부적인 내용이 달라졌다. 어떤 때는 등장인물의 감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하고 다른 때는 다른 갈등 요소를 더하기도 했다. 듣는 사람의 태도 역시 다르다. 아이들은 단지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질문을 했고, 대답을 하다 보면 새로운 얘깃거리가 더 생겼다. 

 “선녀는 왜 하늘나라로 갔나요?”

 “글쎄다. 하늘나라가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럼 나무꾼은 안 좋았어요?”

 “나무꾼도 좋았겠지만, 하늘나라에서 편하게 살다가 땅에 내려와서 사니까 힘든 점도 있었겠지. 게다가 나무꾼이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거잖아. 나무꾼이랑 결혼한 게 자기가 진짜로 원했던 것인지 의심이 들지 않았을까?”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동화책을 벗어나기도 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파이 이야기>였다. 호랑이와 하이에나 같은 동물들(아이들이 하이에나를 잘 몰라서 늑대로 바꿔서 이야기하곤 했다)이 나오고, 배를 타고 가다 폭풍우를 만나 포류하고 죽음의 섬에 하룻밤 머무는 내용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마지막에 있는 반전 역시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은 파이가 들려준 두 가지 이야기 중에서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들었던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몇 가지 이야기만 알아도 충분했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다 보면 아이들은 내가 빠트리는 것들이나 바뀐 내용들을 지적했다. 아이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원하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으면 나의 경험담들을 이야기로 꾸며서 조금씩 들려주었다. 10살 무렵 첫사랑을 만났던 학생의 이야기와 어렸을 때 억울하게 혼났던 꼬마의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이야기 덕분에 아이들과의 등, 하교 길은 즐거워지고 짧아졌다. 아이들과 더욱 친밀해진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것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나와 함께 학교에 오가는 것을 즐기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아침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 것이 곤란한 때도 있긴 하지만 아직은 들려줄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나중에 아이들이 크면 예전에 독일에 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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