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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Dec 06. 2018

첫날, 발톱이 부러지다

독일 생활의 시작은 설렘보다는 배움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물건이 가득 든 이민가방은 허리춤까지 오는 높이에 30kg 정도의 무게였다. 1년 이상 유럽에서 지내게 된 터여서 필요한 것들을 한두 가지씩 넣다 보니 무거워졌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3번째 가방을 내리던 때였다. 천으로 된 손잡이 부분이 드드득 뜯어지면서 가방이 아래로 떨어졌다. 슬리퍼를 신은 발 위로 떨어졌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가방을 엘리베이터 앞으로 옮긴 후 돌아오는데 아래쪽이 싸늘했다. 발을 올리고 살펴보니 왼쪽 검지 발가락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발톱은 30도 각도로 들려 있었다. 가방이 떨어질 때 바퀴가 발가락을 찧은 듯했다. 걷는 것이 불편했다. 2017년 8월 22일. 독일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이민가방의 오른쪽 손잡이가 뜯어진 모습이다.

 발톱의 상처는 독일에 도착한 힘들었던 하루의 흔적이자 험난한 외국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경고였다. 독일행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혼자 혹은 연인과 함께 하는 낭만적인 여행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이들과 함께 긴 비행을 끝내고 도착한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붐비고 낯설었다. 수하물 찾는 곳에서 우리의 짐을 모두 내리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커다란 이민가방 3개, 캐리어 3개, 카시트 2개, 김치 1 상자가 우리의 짐이었다. 나는 이민가방 3개에다 카시트와 김치를 얹은 카트를 밀었고 아내는 캐리어를 끌었다. 많은 인파와 복잡한 갈림길에서 길을 찾는 것도 녹록하지 않았다. 기내에서 신고 있던 슬리퍼를 운동화로 갈아 신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유럽에 살고 있는 처제네 부부가 공항으로 마중 나와 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뒤셀도르프에 있는 집으로 먼저 출발했다. 나와 아내는 렌터카 회사 차량을 타고 근처에 있는 랑엔이라는 도시로 가서 1년간 리스한 차량을 받았다. 오후 7시 반이었다.


 기름 넣는 방법도 달랐다. 리스한 차량에 기름을 넣기 위해 가까운 주유소로 갔는데, 한참을 서성거렸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셀프 주유소처럼 직접 주유를 해야 하는 것인지 보았지만 안내 문구나 신용카드를 투입하는 곳이 없었다. 얼마 후 다른 손님이 와서 그에게 기름 넣는 방법을 물었다. 손님들이 스스로 원하는 종류의 기름을 원하는 만큼 넣는 것이었다. 기름을 다 넣은 후에는 한국 편의점처럼 생긴 주유소 건물로 들어가 각자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참으로 사소한 것까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앞으로 유럽에 머무는 동안 수도 없이 겪게 될 문화적 차이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쉽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감이 들었다. 

독일 주유소의 주유기. 각자 알아서 주유기를 들고 기름을 넣은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계산을 한다.

 목적지인 뒤셀도르프까지는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절반쯤 오는 길에 해가 졌다. 독일의 고속도로는 어두웠고(도로에 가로등이 거의 없다) 제한속력이 없는 도로에서 차들은 거칠게 달렸다. 나는 가장 오른쪽 차선에서 화물차 뒤를 졸졸 따라 달렸다. 거리의 풍경과 고속도로 표지판, 리스한 차량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뒤셀도르프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도착할 때쯤 동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건물 주차장 쪽이 공사 중이어서 길이 막혀 있으니 조금 돌아서 와야 해요.”

 과연 그랬다. 네비를 따라갔더니 길이 막혀 있었다. 차를 돌려서 공사 구간 너머에 있을 장소를 찾아 삥 돌았으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도심의 도로는 일방통행이 많은, 좁고 복잡한 길인 데다 주변이 너무 어둡고 비슷해서 어디가 어딘지 잘 분간되지 않았다. 20여 분을 헤맨 끝에 결국에는 동서의 도움으로 주차장 입구를 찾았다. 너무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그냥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민가방을 내려야 했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발가락을 다치고 말았던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의 구조와 인테리어가 한국과 다른 게 한눈에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발톱을 보았더니 살짝만 건드려도 통증이 느껴졌다. 발가락을 다친 게 큰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신체의 완전성이 훼손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다음날 나와 아내는 1년 반 정도 그곳에 살고 있던 지인을 만났다. 외국 생활에 관한 이런저런 조언을 듣다가 발톱 치료를 위해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독일어가 능숙한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발톱은 전날보다 더 아팠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통증이 느껴져서 왼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하지만 근처에 문을 연 병원이 없었고, 진료 중인 곳이 한 군데 있었으나 곧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때는 수요일 오후 1시 반이었다. 지인이 말하기를 8월은 휴가철인 데다가 수요일은 보통 오전에만 진료하기 때문에 병원을 찾기 쉽지 않다고 했다. 평일 오후 2시도 안 됐는데 문을 연 병원이 없다니... 기가 막혔다.     


 응급실이라도 가자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조금 큰 병원으로 갔다. 지인의 도움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접수증을 작성했다. 담당자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1시간을 기다려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여러 차례 문의했지만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담당 의사가 언제 오는지 물으니, 자신도 알지 못한다면서 긴급한 일이 해결되어야지만 온다고 했다. 지인을 돌려보내고 아내와 둘이서 계속 기다렸다.  

   

 2시간 가까이 기다렸지만 의사는 결국 오지 않았다. 아니, 의사가 있는 듯 보였지만 나를 진료하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해 나는 ‘응급’ 환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병원을 나왔다. 근처 약국으로 가서, 약사에게 상처를 보여준 후 연고를 구입했다. 나와 아내는 독일이 ‘제약 강국’이라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3분의 2쯤 떨어진 발톱은 차라리 완전히 떨어진 것만 못했다. 이불을 덮고 누워 있을 때, 옷을 입을 때, 신발을 신을 때 발톱이 닿으면 움찔하면서 통증을 느꼈다. 2-3주가 지나자 약국에서 산 연고가 효과가 있는 것인지, 단지 시간이 지나서인지 통증이 덜해졌다. 그런 날이 두세 달 이어졌다. 발톱은 신경이 죽어서인지 검게 변해갔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다친 발톱은 점점 잊혀갔다.     


 그 후 몇 개월이 흘러 독일 생활에 상당히 익숙해졌다. 더 이상 주유하고 운전하고 병원 가는 것에 헤매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든 점이 많았다. 외국 생활은 언어와 문화가 달랐고 식습관도 달랐다.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의지할 만한 곳도 없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이러한 시간이 앞으로의 삶에 힘을 더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세월이 흐르면 지금의 시간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 될 것이다. 배는 항구에 있으면 안전하지만, 그것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투정 부리던 아이들도 어느새 한 마디씩 독일어를 하고 있었다.      


 발톱이 떨어진 건 올해 2월쯤이었다. 욕조에 들어가 샤워를 하려고 양말을 벗었는데, 뭔가 툭하고 떨어졌다. 욕조 바닥을 살펴보니 잿빛의 네모난 발톱이었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닌 플라스틱 조각 같았다. 다친 발톱이 떨어진 자리에는 새로운 발톱이 반쯤 올라와 있었다. 아직 연약해 보이지만 발가락에 단단하게 붙어서 자리 잡고 있었다. 너도 그동안 자라나고 있었구나. 나는 왠지 모르게 아주 조금은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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