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즐겨찾기 Dec 09. 2018

알파벳과 숫자를 읽지 못하다

놀기만 하는 독일의 어린이집, 천천히 진행되는 교육

 독일에 온 직후 아이들의 어린이집을 알아볼 때였다. 뒤셀도르프 시에서 알려준 목록 중 두 곳의 어린이집에 자리가 있어 직접 찾아갔다. 어린이집의 운영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두 명의 원장 선생님은 같은 말을 했다.

 “여기는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노는 것을 도와줄 뿐이에요. 아이들이 잘 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 철학입니다.”     


 교육기관인 유치원(독일에도 소수의 사설 유치원이 있다)이 아니라 보육기관인 어린이집에서 뭔가 가르쳐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처럼 철저하게 ‘놀이’에 치중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알파벳과 숫자 정도를 알려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첫째와 같이 취학 직전 아이들에게는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7월쯤에 자기 이름 쓰는 법과 20까지의 숫자 읽는 법을 가르쳤다. 다시 말해, 그것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가르쳐주는 전부였다. 독일 아이들은 한국 나이로 7살이 되어도 알파벳과 숫자를 읽지 못했다.


 어린이집에 비치된 홍보용 책자에서 이런 문구를 보았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긴 해도 실제 눈으로 보니 느낌이 달랐다.

 “노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Spielen ist Lernen).”

 이것이 독일 교육의 모토였다. 책자에 따르면, 아이들은 놀면서 종합적으로 스스로 배울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놀면서 자기의 관심사나 장점, 학습능력, 자신감, 독립심을 기를 수 있다고 한다.    

"노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놀이의 장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4월 말의 어느 목요일이었다. 나와 아내는 오후 4시쯤 아이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갔다. 독일의 어린이집은 한국과 달리 부모가 직접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시스템이다. 이것이 조금 불편하긴 해도 시간을 유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장점이었다. 등원은 오전 9시, 하원은 오후 2시 반이 원칙이지만, 상황에 따라 7시 반부터 등원할 수 있고 하원은 4시 반 전까지 하면 된다. 하원 시간이 퇴근 시간에 비해 이른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들은 바에 의하면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는 경우 부모 중 한 명은 반드시 4시 이전에 퇴근해야 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 건물 뒤편에 있는 놀이터에 있었다. 독일의 모든 어린이집들은 실외 놀이터를 하나씩 갖추고 있다. 놀이터는 철조망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공간이고, 오로지 어린이집 교실을 통과하여서만 드나들 수 있다.


 어린이집 놀이터는 꽤 넓었다. 구색만을 겨우 갖춘 것이 아닌, 한국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간에 있어도 되는 정도의 크기와 규모였다. 놀이터는 운동장 같이 넓고 평평한 형태가 아니라 작은 숲의 모습에 가까웠다. 놀이터 둘레와 군데군데에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나무들 사이로는 아이들만 지나다닐 수 있는 크기의 좁은 통로가 있었다. 놀이터 곳곳에는 미끄럼틀을 비롯하여 몇 개의 놀이기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이들이 다녔던 어린이집 놀이터의 모습이다.

 첫째 아이는 교실 문 바로 앞에 놓인 네모난 탁자에 선생님과 함께 앉아 있었다. 태양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어서인지, 탁자 위로 커다란 파라솔을 설치해서 그늘을 만들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첫째는 종종 탁자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둘째는 친구들과 함께 미끄럼틀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 벗은 상태였고 모래에서 뒹굴어서인지 옷에 하얗게 흙이 묻어 있었다.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둘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와 안겼다. 둘째의 등과 머리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에게 달려와 안겼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집에 가면 잘 있으라거나, 잘 있었냐고 인사만 하던 나에게 어느 날 아이들이 안아달라고 먼저 말했다. 아마도 다른 아이들 모두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아이들을 꼭 안아서 다독거려 주곤 했다.     


 아이들은 10분만 더 놀겠다고 말했다. 노는 게 정말 즐거운 듯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노는 것만 좋아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됐다. 특히 첫째는 한국에 있었다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터였다. 이렇게 놀기만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너무 뒤처져서 학업에 흥미를 잃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첫째의 친구들이 유치원은 몇 개의 학원을 다닌다, 벌써 2학년 공부를 하고 있다, 영어 말하기는 기본이고 영어 작문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한국에서 들려올 때면 우리가 아이를 너무 무책임하게 방치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린이집 일과표를 보면 오전 중에 단체 활동을 하는 시간이 하루 한 시간씩 있었는데, 노래와 율동, 체육 활동을 하거나, 책을 읽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노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오후에는 항상 놀이터에서 놀았는데, 어린이집에 우비와 장화가 구비되어 있어서 비가 오는 날에도 거의 언제나 놀이터에 나갔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흔히 듣고 보았던 놀이학교와 영어유치원, 각종 학원에 대한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한국에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다닐 때 아이들은 한글과 영어, 간단한 숫자 셈을 배웠다.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이 아이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거의 모든 부모들이 그것을 요구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아이들의 능력을 개발하는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일리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남들에게 뒤쳐져서는 안 된다. 앞서 가지 않으면 그만큼 뒤처지게 되고,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누구에게나 있다. 아내의 친구는 한국의 조기 교육과 선행학습을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영화관에서 앞사람이 일어나서 보기 때문에 모두가 일어나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모든 사람이 같은 영화를 봐야 하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그 영화는 아이들이 선택한 것도 아니다. 아이들의 흥미나 적성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기준으로 아이에게 배움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아닌가. 그러면서 한국의 아이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 간다. 부모들은 학업을 핑계로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며 자신들의 다른 의무에 눈 감고 있는 게 아닐까.     


 독일의 교육은 취학 전인 만 5-6세의 아이들이 알파벳과 숫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이는 아이들의 두뇌 발달 단계에도 부합한다. 아이들의 두뇌는 만 7살 정도가 되어야지 언어와 수학교육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된다고 한다(<아이의 사생활>, 68쪽). 다섯 살의 아이가 한글을 줄줄 읽는다고 해서 그것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 교육은 초등학교 시기에 시작하는 것이 옳고, 취학 전 아이들에게는 올바른 생활태도나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예절 교육과 도덕 교육을 우선해야 한다(같은 책, 67쪽). 아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놀이 활동을 하게 하면서 규칙과 도덕을 몸소 익히게 하는 것이 독일 어린이집의 교육 방식이다. 이것이 "노는 것이 배우는 것"의 의미이다.


 물론 독일 아이들도 취학 전에 일부 사교육, 특히 영어교육을 받기도 하고 학교에 들어가면 경쟁을 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놀면서 배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때는 배움(learn)이 아닌 공부(study)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독일의 교육은 교육 과정이 매우 천천히 그리고 즐겁게 진행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한한 경쟁의 바다에 던져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물과 친해지는 것부터 아주 천천히 착실하게 배우면서 자신의 재능과 기호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교육에 관한 제도와 문화는 나라와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형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독일과 한국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한 사회의 정치 수준은 시민들의 의식을 반영한다.”는 명제를 믿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교육 제도와 문화는 국민들의 발전과 경쟁에 대한 욕구를 반영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리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어떤 것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고,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나는 적어도 아이들이 재능이나 기호 혹은 발달 단계와 무관하게 어린 나이에서부터 심한 경쟁과 압박감 속에서 살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