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다 떨어져간다.
기다랗기도 짧기도 한 횡단보도를 건너고 몇개인지 모를 정류장을 지나친다. 몇년째 창고정리 세일을 하는 양말가게와 매대에 늘어놓은 과일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온다. 1층에 자그마한 약국이 있는 병원 건물은 이 곳의 외딴 섬 같다. 고요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발걸음 소리가 바쁘게 들린다. 이곳은 사람이 유독 많다. 두시간은 지나야만 내 차례가 온다. 여기서 기다리겠냐는 물음에 그냥 고개만 끄덕인다. 빈 곳에 자리를 잡고 아무렇게나 기대 앉는다. 데스크에서 들리는 말소리를 훔쳐듣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해본다. 선잠 끝에 어렴풋이 들리는 내 이름에 짐을 챙겨놓고 노크를 한다. 문 사이로 보이는 환한 얼굴에 따라 웃어도 본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2년 째 같은 질문이다. 여전히 난 바로 대답하길 망설인다. 그냥저냥 잘 지냈어요, 라고 뭉뚱그려 말하기엔 겪어낸 감정의 파고가 깊다.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기엔 듣는 사람의 피로함을 안다.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찰나의 시간을 한켠에 미뤄두고, 나는 하릴없이 웃는다.
괜찮았어요. 이 정도면 적당한 대답이 될까 싶어서.
나의 모난 성정은 날카로운 돌과 같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돌맹이를 두 손이 터져라 꽉 쥐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그걸 언제든 남에게 던질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 돌은 스스로를 상처입힐 뿐이었다.
그늘지고 뒤틀린 나의 구김살은 사회성이라는 후천적 학습으로 얼추 가려지는 듯 했다. 그러나 얼기설기 엮어놓은 얇은 커텐은 작은 바람에도 손쉽게 일렁였다. 늘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마음의 병을 알아차린 그 순간부터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나의 기질적인 불안과 우울, 널뛰기하듯 변하는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리모컨은 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갈 때마다 옆 차선에서 차가 끼어들고 급정거를 하고 차체가 뒤집히고 온 살갗이 찢기어 뼈가 뒤틀리는 끔찍한 상상을 1초만에 해내는 나로서는. 모든 시도가 있기 전에 언제나 파국적인 결말을 예상하고, 내가 저질렀던 모든 실수를 하릴없이 곱씹는 나로서는 손을 쓸 수가 없는 일이다.
얼마 전부터 먹는 약의 양을 줄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앞에서 우는 날보다 웃음을 보이는 날이 많아졌다. 감정의 변화 폭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수천가지의 경우의 수를 계산하느라 늘 팽글팽글 돌아가던 머리도 놀랍게도 차분해졌다.
나는 정말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선명한 4B연필로 무언가를 눌러쓴 것을 지우려고 해도 흔적은 남는다. 연필심의 흑연은 지우개 가루에 뭉쳐 없어질지 모르겠으나 꾹꾹 내려쓴 필압의 흔적은 그대로다. 마찬가지다. 내 인생에 있어서 우울과 불안은, 마치 온 힘을 다해 눌러 쓴 글자를 싸구려 지우개로 지운 것과 다름이 없다.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말끔히 샤워를 끝내고 나와 허공을 가득 메운 눈발을 보며 첫 끼니로 초밥을 시켜 먹었다. 눈을 보면서 창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려던, 어제의 내가 세운 계획은 오늘의 나로 인해 지켜졌다. 냉장고의 맥주를 꺼내는데 꼭 눈을 맨 손으로 만지는 것만 같았다. 몸이 차지는 것 같아 함께 차를 끓이기로 했다.
포글포글 올라오는 포트의 김을 바라보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알코올은 억제중추신경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지. 캐모마일은 심신의 안정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나는 무얼 원하기에 맥주와 캐모마일을 동시에 마시고 있는 걸까?
흔히들 맥주는 벌컥벌컥 들이키는 맛이 있고 차는 맛과 향을 음미하는 거라고들 한다. 나는 그 말에 무슨 시위라도 하는 것마냥 맥주를 입안에 머금기도 하고 반쯤 식어버린 차를 한번에 들이킨다. 고심 끝에 사온 맥주는 별로 맛이 없었다. 바닥을 보인 차를 한잔 더 끓이기엔 티백이 부족하다.
그럭저럭한 하루가 지나간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하루를 견뎌낸 나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까.
끈기도 의지도 능력도 부족한 나에게 삶이란 엉성하게 걸친 가품과도 같았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진짜들 속에서 가짜는 반드시 표가 나기 마련이다.
그저 그런 일상 속에서 어거지로 일으켜 세운 것들을 지탱하던 동안 나의 어금니는 닳고 닳았다. 긴장이라는 허리띠를 숨이 막힐 때까지 졸라매면 꽉 다물어진 턱을 억지로라도 벌려볼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날카로운 원망과 연민을 오래도록 담고 있던 마음은 해질 대로 해졌고 그 어떤 것도 담기지 않는다. 남들에게도, 나에게도 건넬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지 오래다.
바깥에서 눈이 내린다. 이미 젖어있는 땅 위로 쌓이는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얗기만 하던 눈은 새카만 도로 위를 조용히 적실 것이다.
지금이 나의 절단선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