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라이프
그다지 크지 않은 냉장고가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면서 부터 점점 더 헐렁거리기 시작했다.
곡물을 다양하게 먹지만 굳이 냉장고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고, 채소와 과일도 기껏 2~3일치씩만 사서
냉장고 속으로 들어간다.
고기와 생선으로 가득차던 냉동실에는 고추가루와 아마씨가루 등의 다양한 가루 종류와
살짝 익히면 냉동보관이 가능한 채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길게 놔두는 건 오직 김치와 장아찌, 몇개의 소스류 뿐이다.
거기에 매 끼니마다 해 먹고 남은 반찬이 들어간다 해도, 냉장고 속은 안까지 다 보일 정도로 훤해졌다.
예전보다 훨씬 더 깨끗해졌고, 가지런해졌다
그러자 마음에도 한껏 더 여유가 생겼다.
텅 비었지만 원하면 언제든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부자가 된 것 처럼.
한때는
한치도 빈틈없이 냉장고를 채우며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채우면 내 안의 모든 결핍이 채워질 것처럼, 그리고 꾸역꾸역 먹어서 몸 안을 채웠다.
뱃속이 채워지면 잠시 충만함이 깃든 것 같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충만함의 환상은 어느 새 사라지고, 나는 또 배고픔에 시달리며 냉장고를 채웠다.
내 손안에 들어온 약간의 돈이 다른 무언가로 사라지기 전에.
그러면 조금은 안심이 돼서 길고 긴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결핍감으로 단단하게 결박지워진 마음은 꾹꾹 눌러 그대로 둔 채.
그때나 지금이나 상태가 크게 달라진 건 아니지만 결핍감은 무뎌졌다.
나의 허기는 비워진 냉장고가 아니라 마음의 결핍감에서 온다는 걸 알고 나서 부터였다.
채우려는 마음이 깊을수록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과 멀어졌다
그냥 멀어질 뿐만아니라 더더욱 깊고 검은 우물 속으로 빠져 든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알아진 어느 날, 그 순간부터 서서히 내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삶은 마치, 도돌이표가 그려진 오선지 위의 음표대로 계속 연주되듯
차고 시린 채로 가이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는 순간 도돌이가 그려진 오선지를 마음에서 치워버렸다.
이제 좀 살아지겠지 하며.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한 번 그려서 내 앞에 펼쳐졌던 그 오선지는 끊임없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면 마음은 영락없이 깊은 우울로 채워졌고, 결핍감은 처음보다 더 질량을 무겁게 해서 마음을 짓눌렀다. 그렇게 짓눌리다 질식하기 직전 정신차리고 똑바로 바라보길 얼마나 했는지.
나도 모르게 비우고 버리고 놓아버림으로서 집착에서 느슨해졌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자연과 흐름을 같이 하려하고, 소박해지고 또 담백해졌다.
매번 냉장고를 채우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필요한 것이 채워짐을 알겠고,
또 설사 채워지지 않는다 해도 개의치 않는 여유도 생겼다.
그랬다.
그냥 탁 놔버려봐요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환하다. 깔끔하다. 단정하고 가지런 하다. 근데 지금 그냥 딱 꺼내 먹을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