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주인 4
종일 귓가에서 사각거리던 그의 목소리는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스트레스로 머리숱은 반으로 줄었고 몸무게도 10킬로그램이나 빠졌다. 내 몰골을 보다 못한 친구들이 S에게 여러 번 항의했지만, 그는 언제나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침묵으로 버틸 뿐이었다. 나 때문에 불편을 겪으면서도 내 편이 되어 주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학원을 계속 다닐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즈음, S의 친구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버스를 타며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S가 직접 나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정신을 덜 피폐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의 친구들 중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한 명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S가 수업에 집중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해 보기도 했지만, 모두 ‘의리’를 내세워 거절하거나 ‘남의 일’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S의 일방적인 감정 표출은 방향을 잃고 돌진하는 자동차와 다름없었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매일의 삶에서 몸도 마음도 편안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내가 끝내 아무런 반응이 없자 S는 불같이 화를 내며 며칠을 보내다가 나를 본체만체하더니 더 이상 내 옆에 앉지 않았다. 그가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공부도 더 잘되는 것 같았고 지금 당장 수능을 봐도 원하는 점수를 얻을 수 있을 듯한 자신감도 차올랐다. 무엇보다 모처럼의 평안한 날들이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주말에도 학원에 나와 자습에 열중했다. 바쁘게 문제를 푸는 연습장 위로 한두 방울씩 피가 떨어졌다. ‘훗, 내가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나?’ 코를 비비고 확인했지만 내 코는 멀쩡했다.
‘응?’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S의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가 내 연습장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피가 멈추지 않았다.
‘피… 피!’
겨우 내뱉은 비명에 주말 자습 중이던 모두가 몰려들었다.
“내가 손금 운을 봤는데 애정선이 짧대.
그러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칼로 그어 애정선을 길게 만들어봤어.”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엽기적인 광경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심지어 그의 조력자들마저도 뭐 하는 짓이냐고 그를 말리려 했다. 비명과 욕설이 오가는 가운데, 내 책상 앞에 선 그는 지혈도 거부하며 요지부동이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한 얼굴, 그 와중에도 나의 반응을 살피는 차분한 눈, 붉게 물들어 못 쓰게 된 내 연습장, 그리고 차에라도 치인 듯 주저앉은 나.
‘네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진짜였다면 관찰 일기가 아니라 연애편지를 써보지 그랬어? 떡볶이나 쫄면을 같이 먹자고 말해보면 어땠어? 정말 쑥스러워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면 안녕이라는 인사부터 시작할 수는 없었니? 아직도 나는 네 이름 말고는 너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제는 네가 너무 무서워.’
손바닥을 그었다는 소문은 그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학원을 몇 바퀴 돌았다. 피와 사랑은 인기가 많았다. 이제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르는 척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악몽의 여름.
조용히, 무사히 지내고 싶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