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주인 6
그는 나를 실제로 찌르지는 않았다. 대신 내가 굳게 믿었던 ‘사회적 안전망’과 ‘자존감’을 산산이 깨뜨렸다. 친절은 친절로 돌아온다고 믿던 나에게 그의 공격적인 행동은 몹시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그럴 수 있는 ‘만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고, 나는 그저 ‘예민한 사람’이 되어 점점 더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커다란 불안과 혼란 속에서 나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적절한 대처 방법도 찾지 못했다. 주변의 시선과 구설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나이만 성인이었을 뿐, 아직 나비가 되지 못했던 나는 안전한 번데기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일방적인 애정 호소가 번데기 한쪽 귀퉁이를 찢기 시작했고, 나는 상처 입은 채 구석에 몰려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물리적 폭력 외에도 정신적 괴롭힘이 폭력의 범주에 속한다는 인식이 옅었다. ‘스토킹’이나 ‘가스라이팅’ 같은 말들도 널리 쓰이기 전이라, 그의 행동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낭만적인 행동으로 미화되었다. 선생님과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해 볼까 했지만, 이성 교제는커녕 이성 간의 마주침조차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남학생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 어려웠다. 더구나 그 상황을 잘 설명할 재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설령 설명한다고 해도 어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겉으로 보이는 큰 상처가 남은 것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버텨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해온 공부가 아깝기도 했고, 수능만 끝나면 그와 다시 볼일도 없을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지켜보는 눈이 더 많아졌으니 그가 다시 과격한 행동을 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수능이 다가오자 선생님들은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수업 시간에 노래 부를 사람을 찾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대체 그의 어디가 소심하다는 걸까? 내 쪽을 보며 부르는 애절한 사랑 노래를 견디기 힘드었다. 나는 후렴 부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후렴에서는 그가 눈을 감고 혼자만의 감정에 취해 있었기에 나를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업-시험-자습 그리고 소문-확산-고요.
비슷한 날들이 후렴처럼 반복되던 초가을의 주말, 갖은 노력에도 내가 여전히 무반응이라며 그가 볼멘소리를 했다.
“애정선을 늘려도 안 이루어지는데,
죽으면 어떻게 될까?”
들려오는 소리를 줄곧 외면하던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창틀에 앉아 있던 S와 눈이 마주쳤다.
“야! 나 뛰어내릴 거야!”
S의 말에 일렁이기 시작한 공기가 금세 내 자리로 밀려왔다.
“이리 와서 좀 말려봐, 얘 정말 뛰어내릴 것 같아!"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일까. 아니, 협박이겠지.
“말리지도 않네? 내가 없어져도 상관없을 정도로 내가 싫어?”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럼 사라져 줄게.”
하지 마, 내려와. 내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그는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창밖으로 사라졌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