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자주 아프면 마음이 먼저 지친다. 벗어던져 놓은 양말처럼 마음이 구겨진다. 또 아프네. 또. 어느 날은 집에 걸어오다가 가슴이 조이고 시야가 아찔해지더니 그대로 길바닥에 넘어진 적도 있다. 그러나 4시에 아이가 온다. 아이가 온다는 사실이 나를 몇 번이고 살렸지. 덜덜 떨려 분리될 것 같은 팔다리를 하나씩 달래며 일어났다. 걸었다.
우울은 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우울은 불이었다.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발화점이 너무 낮았다. 자꾸 불붙는 생각에 덴 나는 뜨겁고 아파서 미친 듯 쏘다니기만 했다. 차라리 다 타서 부서지고 싶었다. 가슴이 시원해질 새도 없이 잔열에 금세 휘발되는 눈물은 고통을 1g도 덜지 못했고, 마른 마음에서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유 없이 아프고 비실비실한 지 20년째다. 검진을 받았다. 꾸준히 운동했다. 소개받은 병원을 찾아갔다. 영양제, 한약… 나름대로 안 해 본 것이 없는데도 신통치 않았다. 정신적으로 너무 시달린 탓일까? 교통사고 후유증일까? 어떤 때는 원인이 밝혀져서 약이라도 처방받고 싶을 때가 있다. 이제는 그냥 체질이려니 한다. 골골하면 장수한다는 말도 있다고 웃어도 본다.
내가 웃는 것은 남편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신혼 시절에도 잘 먹지 못해 링거를 자주 맞았다. 수액실에 나란히 누운 다른 사람들의 기척도 거슬려 병원에 양해를 구하고 집에 와서 링거를 맞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휘청거리는 나를 업고 집까지 가 주었다. 링거병을 들고 업혀 가는 내 등에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나는 얼굴을 숨기려 더 움츠렸고, 그는 자기 성정처럼, 호기심 어린 시선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갔다.
나는 몸과 마음이 병들어서, 아이들을 혼자 돌보는 것이 버거워서, 경제적 부담을 남편 혼자 지게 해서 늘 미안하다. 나의 오랜 불행을 다 알고 있는 남편은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지극정성으로 잘해주면 내가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임을 깨달았다고도 했다. 산후조리도 충분하지 못했던 데다가 나이가 들어 약해지는 것도 있으니, 회복이 더 안 될 것 같다고, 그 소원은 버렸다고 했다. 과묵한 사람의 몇 마디 말은 이토록 무겁고 쓸쓸하다.
최근 3년간은 그야말로 ‘영혼을 채워 넣는 시간’이었다.
허기진 나는 수유용 티셔츠를 모조리 버리고, 새 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 10년 만에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도 가봤다. 서울에서 만난 친구가 ‘저기가 방송통신대학교야.’라고 말해주어서 그다음 학기에는 방송통신대학교에서 해 보고 싶던 공부를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하는 글쓰기 수업도 들었다. 책도 열심히 읽었다. 하던 대로 아이들을 돌보고 먹였다. 여전히 아팠다.
막내가 일곱 살이라는 것이 나의 운명이므로, 나는 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울이 날름날름 덤벼들면 질세라 물을 끼얹으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능동적으로 살아갈수록 나는 흔들렸다. 뱉어내야 살 것 같던 20대 때의 일들을 글로 써서 올여름에 겨우 브런치 연재를 마쳤다. 여전히 창문 같지 않고 거울 같은 글이었지만 살기 위해 썼다. 연재하는 동안은 거의 매일 꿈을 꾸거나 가위에 눌렸다.
어떤 글은 쓰고 나면, 그 글을 써내기 이전과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하던데 나의 영혼은 조금은 더 안녕할까? 연재를 마친 후로는 어쩐지 일기조차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영혼의 안부를 알 수 없다.
링거를 맞으며 업혀 있던 내가 이제는 아이들을 업고 있다. 밀려 내려오는 과거와 넘실거리는 미래 사이에 서 있다. 그런 면에서 현재는 영원히 하류이다. 내일로 가는 길은 매일 막막해 보인다. 이대로 물과 불에 삼켜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아이들이 여러 번 나를 살린 것을 기억한다. 또 한 발 내디뎌야 알게 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궤도를 삶 쪽으로 가까이 수정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