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마흔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문득 그랬다.


새벽녘 동이 터오는 어스름한 햇살도

어룽어룽 모여드는 그 바람도

펜을 또각이는 소리도

그저 네게 건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웠고 보고팠고 아련한 감정같은 것들보다

그냥 네게 내가 보는

지금 이 순간을 주고 싶었다.


몇 바닥 밖에 되지 않는 종이에

이런 것들을 꾹꾹 담노라면

네가 없는 빈자리가 어렴풋이 메꿔지는 듯 하였다.


오늘은 별이 예뻤다.

가을 닮은 향기가 났고

유난히 네가 좋아할것만 같은

구름이 흘렀다.


네게 이런 것들을 주고 싶었다.



-Ram


1.

언제였더라,

가방 속에 손을 넣어보면 조용하게 자리를 차지하던 편지가 있었고,

지갑을 열어보아도 꼬깃꼬깃 접은 편지가 있었다.

어릴 때 보물찾기를 하다가 상품이 적힌 쪽지를 발견하듯이,

서랍 깊숙이 잠자고 있던, 그동안 잊고 지냈던 귀걸이를 발견하듯이,

의도치 않게 편지를 발견할 때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엄청 기쁘고 설레는 마음을 꾹꾹 참아내며,

편지를 발견한 짜릿함을 조금 더 느끼고자 몇 초 전, 몇 분 전,

편지를 발견한 순간을 다시금 새기고자,

고이 접혀진 종이를 쉬이 펴보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나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원래 글을 읽는 속도가 빠르고, 성격이 급하여, 빨리 읽어내려가고 싶은 눈길을

자제하고, 자제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놓칠새라 소중하게 읽어내려갔던,

그런 때가 있었다.


2.

특별한 날에 편지를 쓴다는 것은,

뭔가 뻔한 내용들이 담겨있고 특별한 날에 꼭 행해야 할 것만 같은

의식같은 느낌이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그냥 일상 속에서 예상치못하게 편지를 쓰는 것(받는 것)을 좋아했고, 좋아한다.

일상 속에서 받아보는 편지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어여쁜 편지지에 볼펜으로 썼기에 어쩌다 잘못 적은 글자를 지울 수 없어

수줍게 글자 위에 엑스표를 하거나, 실선을 주-욱 그으면서 소중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야무지게 각을 맞추어 구져지지 않게 두어번 꼭 접어서 편지봉투에 꼭 맞게 넣는 그 희열감은 시간이 지나고 사라지지 않을텐데.


3.

하고 싶은 말들을 이제는 스마트폰 메신저로 인해서

상대방에게 1초만에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손편지는 이제 정말 귀해졌고,

마음을 담아 쓴 메일 역시 받기가 힘들어졌다.

그래도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소중한 이메일들을 받는다.

그들의 이메일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어쩌다 몇 문장 되지 않는 추신이 반가울 때가 많다.


4.

세상에 내가 직접 만들지 않는 이상,

내게 딱 맞는 맞춤형은 아무것도 없는데,

잠시 돌아만 봐도 그동안 나는 이기적이게

모든 것들을 너무 욕심냈던 것 같다.

마음 속에 조금의 여유와 인내심과 이해심이 있었다면,

충분히 내 안에 품고 지나갈 수 있었던 것들을

너무 쉽게 등돌려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득해지자.


5.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부쳤다.



-Hee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럴때마다 편지를 썼다.

나는 왜 그랬던 것일까...

왜이리 너에게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던 것일까


내가 걷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어 망설이고 있는 내 앞에서

너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있게 손을 들었다.


너의 확신은 옳았을 수도 틀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 행동 자체는 잊을 수 없는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최전선에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

'항상 자신이 당당한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확신이 없는 길일지라도

함께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모두 표현할 수는 없었다.

나의 표현은 그렇게 너의 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너로부터 얻은 보석은 신념이 되어,

그 작은 보석은 내 삶의 동력이 되어

매일같이 이 길의 최전선으로 향한다.



-Cheol


먼저는 엄마 암 수술받던 때 일이야. 그날, 당최 눈물은 멈출 줄을 모르는데 무거운 짐을 들고 먼 학교까지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길이 없다. 같이 쓰는 기숙사 방에서는 소리 없이 흐느껴도 돌아앉은 등에서 그 눈물이 보이는 듯 선명하게 들려. 알고도 모른 체하는 마음들이 작은 위로로 와 닿지만 어째서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고집스레 찾아드는지, 억울함에 오래도록 시큰거렸어. 그리고 고작 맹장인 줄 알고 병실에서 희희낙락했다는 사실이 그다음으로 나를 자꾸만 슬프게 만들었고.


부재중 전화를 보곤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으면서 다시 걸려온 전화에는 태연히 일하는 중이라고 거짓말하는 이유를 나는 알면서도 모르겠다.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도 없이 조용하기만 한 식당이라니. 숨겨야 했을 별것도 아닌 일이라니.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다. 언제까지 나는 보듬어줘야만 하는 철부지인지. 아빠가 몰래 엄마 아프다는 사실을 전할 때, 형이 그것도 몰랐냐는 듯 나무랄 때 나는 괜히 엄마의 마음이 서럽고 더욱 슬퍼지고 그래.


엊그제는 여기서 친해진 친구와 저녁을 먹다가 갑작스레 죽어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음침한 말들을 했어. 이런 말을 하면 누구나가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못 살게 굴지만 실상은 그들에게도 사는 건 힘겨워서 그저 버텨내는 일이란 것을 이제는 알겠다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앞에 끼어드는 사람을 고자질하면 엄마가 바쁜 일이 있나 봐 말하고는 내 손을 꼭 잡았어. 다른 무엇을 더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무표정한 얼굴, 꽉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일상의 무게 같은, 고작 몇 분 더 기다리는 일이 분에 겨워 못 견디던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이제는 알겠어. 삶이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는 말도, 엄마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그래도 엄마. 엄마가 작아지는 동안 나는 조금씩 더 자라서 그게 무엇이든 버텨내는 방법을 나름대로 익혔어. 멀리 떨어져 사는 내가 해줄 게 많이 없더라도 아픔을 혼자서 삭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자연스레 말할 수 있는 가족은 어째서 내게 이렇게 아득한 지. 단지 그런 마음이 나를 더 쓸쓸하게 만든다는 게 아니라, 아직 어설프고 허술한 나라도 엄마가 진 무게를 나눠질 수 있다고, 나눠지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문득 엄마랑 같이 시장에서 장보고 콩나물 다듬고 마늘 다지던 일들이 왜 그토록 즐겁게 기억되는지 모르겠다. 얼른 나아서 맛있는 거 해주라.


160910



-Ho


2016년 9월 11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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