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수"

도란도란 프로젝트 - 백 마흔 한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우리 아빠는 어쩌면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무뚝뚝하고 촌스러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당신은 달달한 다방 커피가 좋고

멀끔한 정장보다 구겨신는 샌들이 편하고

이렇다할 장신구 하나 없는 허전한 손목이 좋다고 했다.


이런 아빠를

누구는 답답하다고 했고

누구는 재미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빠는 표현에 서투른 사람이라

딸아이 손하나 잡는 것에도 고민이 필요했고

밥 한끼 같이 먹는 것도 요란스러워 보였다고 했다.


그랬던 아빠랑 빙수를 먹었다.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단 둘이.


요즘 아이들은 이런데서 이런걸 먹는다더라

멋쩍은 웃음 너머로 아빠가 보였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갈라진 손등이 보였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인 안경테와

몇 년 전 어버이날 선물로 주었던 티셔츠와

뜨문뜨문 흰머리가 검은 머리와 뒤섞인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시킨 빙수는 한 그릇에 만 원 가까이 했고

놀란 아빠를 지나

요즘은 그렇다고 퉁명스레 말하는 내가 있었다.


빙수를 가운데 두고 우리는 별스러운 얘기는 하지 않았다.

가게가 잘 안된다던가, 취업이 걱정스럽고 힘들다는

그런 이야기는 덮어두고

살이 쪘다는 둥, 흰머리가 자랐다는 둥의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빙수가 스륵스륵 녹아내렸다.


바닥을 채 보이기도 전에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아빠는 그 만 원이나 하던 빙수를

하나 더 포장했다.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아빠의 뒷모습을 보는 딸이었다.



-Ram


1.

그래도 명절이라고,

잊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이 종종 온다.


"우리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열심히 살자"


이번 추석때 내가 받은 메세지다.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2.

올 여름,

생각보다 빙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목이 마르다, 이가 시리다, 맛이 없다,

그런 이에게 흔쾌히 빙수를 건네보았다가 퇴짜를 맞거나,

마지못한 승락을 얻었다.

그리고 빙수의 60%이상의 몫을 내가 해치워야 했다.

단지 상대보다 빙수를 더 좋아한다는 이유로.

단지 상대에게 빙수를 건넸다는 이유로.

그 이후엔 먼저 빙수를 먹자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3.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추억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죄책감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함이 나를 잠식하고, 또 잠식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였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

나는 왜 그런 사람일까.

나조차 설명할 수 없어 길을 잃고 떠돈다.

나조차 어떤 생각을 해도 나를 용서할 수 없다.

껍데기만 돌아다닌다. 그렇게 그렇게.

아무 의욕도, 동기도, 모든 희망도 잡을 수 없이

그렇게 가라앉는다.

감히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후회와 미움만이 가득 밀려들어오고, 그렇게 가라앉는다.

모든 것들을 부질없게 만들었다.


4.

내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 대한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정신을 못차린다.


5.

서글픈 이야기들만 점점 더 많이 들려온다.

마음이 삭막하여 멜로영화를 찾게 되지만,

결국 영화는 재생되지 못했고,

쓰린 마음만 부여잡고 눈을 감는다.



-Hee


1.

혼자 여행하기,

혼자 4DX 영화보기,

혼자 베스킨라빈스 해치우기,

혼자 남자옷 쇼핑하기,

혼자 도서관가기,

혼자 순대곱창 먹기,

혼자 등산하기,

어느 순간부터인가 혼자하는 것들이 익숙해져가는 나이가 되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빙수 먹기'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싸구려 글을 쓰고 있지만,

그래도 빙수먹는 것 만큼은 혼자서는 어렵다.


그래서 나에겐 '빙수 먹자'하는 사람이 참 귀하다.

초코빙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더욱 귀하다.


2.

누군가가 말하길 글을 쓰는건 엉덩이가 쓰는 것이라고도 하고 '마감'이 글을 쓰는 것이라고도 하던데

내가 던져놓은 주제를 놓고 단 한글자도 쓰지 못하는 때도 있어 이렇듯 변두리만 늘어놓는 날도 있는걸까


3.

그냥 네가 빙수를 좋아했으면 했다.

우리 사이에 좋고 나쁨을 따지기 전에 그저 빙수 하나로 시원한 하루이길 바랬을 뿐이다.

좋고 나쁨 그리고 잘맞고 안맞고의 궁합따위는 빙수만 좋아한다면야 아무렴

천천히 시간에 걸쳐 맞추어가면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너와 내가 같은 빙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끔직한 사실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초코빙수처럼 강력한 달콤함만큼은 꼭 통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유치할 수 없지만, 우리 모두 그런 것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그저 우리가 좋아하는 빙수가 달랐을 뿐이다. 그 뿐이다.



-Cheol


감기 걸린다며 찬 음식은 먹이지 말라는 형수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조카들에게 팥빙수와 아이스크림을 먹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는 명절 차례상 앞에서 고모들을 본 적 없다. 약속이라도 한 듯 친척들은 멀어지고 형식만 남은 명절은 편협함만 어질어질하게 넘친다. 웃는 면면들 뒤에서는 끝도 없이 험담 같은 욕설들이 중얼거려졌다. 꼴보기 싫은 사람들에게서 길러진 조카들은 괜히 꼴보기 싫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은 내 귀찮은 눈치에도 울음을 흘렸다. 뜨끔한 내게도 허망한 꼬마들에게도 팥빙수를 먹였다.


6살 즈음에는 우리 집에도 팥빙수 얼음 갈아내는 기계가 있었다. 여름마다 연유와 팥과 젤리, 떡이 냉장고 한 칸에 당당히 자리 잡았고. 놀러 온 이모에게 엄마가 만들어주는 팥빙수가 아까워 이모에게 이제 그만 집에 가라는 말을 했다는 건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도 나를 머릿속에 그리지 않았던 시간의 길이를 볼 수 있다면 나는 얼만큼 더 슬플지(아마도 이제는 아무런 상관없지만). 그에 비하면 팥빙수의 생은 어쩌면 그득한 행복의 생이다. 슬픈 사람이 빙수를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다. 빙수를 먹는 사람이 슬퍼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빙수의 찌르르한 울림에도 나는 실없는 웃음을, 조카들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웃음을 그릴 따름이다.



-Ho


2016년 9월 18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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