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한 번째 주제
내가 사랑했던 시절은
지극히도 현실에 파묻혔던
날들이었다.
아픈 만큼 울고,
행복한 만큼 함박웃음을 뿌리던
굉장한 시간들.
매번 솔직했던 감정표현은
하루하루가 곧이 곧대로
느껴지는 주문이었다.
그때의 새벽 공기가 차갑고
어지럽게 느껴지는 것은
품었던 마음이 거대해서 그랬다.
어느순간부터
방에서는 목놓아 울 수 없어서
검푸른 그림자가 깔리는 놀이터를 찾아
숨죽여 울었다.
굳게 닫힌 문도
누군가가 벌컥 열어버릴 것만 같아서
소리내어 웃을 수 없었다.
자세를 낮춘 마음이어야만
상처가 덜 할 것만 같아서,
몇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았다.
즐거움은 떠돌고
좋아했던 감정들은
지극히 따분한 현실에서도
흔들리며 흐드러진다.
어제 오늘의 나이거나 당신은
옛 추억에 매어져서
발자국만 깊게 남길 뿐,
우리의 현실은 조금 아쉽고
또 치열하다.
-Ram
1.
현실을 맞닥뜨리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다.
시간이 흐르는대로 등 떠밀려 흘러가는 사람과,
어떻게든 시간에 의미를 두려고 하는 사람과,
살다보니 시간이 흘러가있는 사람과,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
2.
비워야 새로운 이야기가 찾아온다는 짧지만 강한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낡고 쾌쾌하고 내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생각과 마음들은 모두 비워낼 수 있길.
신선하고 건강한 새로운 생각과 마음을 얼마든지 받아들여 고여있지 않길.
3.
여러모로 심란하고, 여유가 없을 것만 같은 너의 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내가 너에게 어떠한 힘도 되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네가 조금은 의지했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너는 너대로 꿋꿋하게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건 나도 나의 현실을 꿋꿋하게 잘 이겨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각자의 방식대로 나아가다보면 웃으면서 그날들을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으며,
4.
현실의 색은 내가 어떤 안경을 끼느냐에 달려있다.
아주 생생할 수도 있고, 어두울 수도 있고, 눈이 부실 수도 있다.
이왕이면 난 재미있고 즐거워지는 안경을 낄래.
심란하고, 심각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5.
고작 몇 번 손가락을 움직여 버튼을 누른다는 것이,
사실 누구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지.
6.
한 줄의 예쁜 말.
Loves all of you.
-Hee
매일매일 좋은 글을 써내고 싶다. 인상적인 내용과 누군가에게는 영감을 주는 글들을 매일같이 써내고 싶다. 내가 쓴 글들이 모여 어떠한 큰 인상이 되면 좋겠다.
하지면 현실은 글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글을 쓰지 않는다. 회사일, 스터디, 개인약속에 치이고 미뤄지고 이건 완전히 찬밥신세가 따로 없다. 매주 글을 쓴다는 사실은 그저 무의미한 잡설을 끄적거리는 시간낭비.
“매주 글을 쓰는 습관이 나를 인도할거야, 언젠간 또 좋은 글을 쓰게 될거야, 남들은 쉬이 가지지 못한 숭고한 습관을 갖고있는거야, 매번 좋은 글은 아니더라도 좋은 습관을 갖고있는거야, 이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을 하는거야.” 이따위 자기위로적 소리는 다 집어치워 던져버린다.
현실은 떠오르지 않는 영감, 어쩌다 한가닥 떠오르더라도 순간을 스쳐지나가는 단상. 몇 가닥의 영감을 글로 써내려가봤자 글 전체의 흐름을 관통하는 주제 따위는 잃어버리기 일쑤이고 앞뒤 일관성따위는 없는 그저 멋진 말들의 나열. 한켠으로는 숨은 실력을 가지고서도 발현시키지 않는 비겁자. 이상적인 글을 위해 집중하지 않는 게으른 패배자. 매주 정해진 기한을 습관적으로 지키지않는 지각쟁이. 이것이 현실.
그럼에도 매주 글을 쓴다.
그렇게 매주 현실의 나를 마주한다.
"선생님, 이상과 현실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인가요?"
잠시 숙고하다가 나는 그 학생에게 말했다.
"이상과 현실의 타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실이란 급류, 그러니까 모든 것을 휩쓸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압도적인 강물과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이런 급류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럼 이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나무토막 같은 겁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그 나무토막을 강바닥에 박고 버텨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급류의 힘이 너무 강해 질질 끌려가기 쉬울 겁니다. 그렇지만 강바닥에 박은 나무토막이 없다면, 우리는 급류의 힘에 저항할 수도 없습니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中
-Cheol
송어가 먹고 싶어 찾은 교외의 송어 양식장은 등산을 마친 산악회 사람들로 붐볐다. 연진은 가정집을 개조한 양식장의 인테리어와 분위기가 무인 모텔처럼 음침한 구석이 있다며 싫은 내색을 비췄고 나는 소란하고 끈적거리는 산악회의 분위기에 질려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괜히 아늑하다거나 시골 할머니 댁처럼 정겨운 느낌이 든다고 대꾸했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산 아래엔 꼭 모텔이 있다잖아. 몇 명이라도 있겠지.”
“그런데 난 그게 꼭 나쁘다고만 생각 안 해. 사람이 어떻게 평생을 한 사람이랑만 같이 살 수 있겠어.”
“그건 좀… 안타까운 말이네.”
그때 나는 그녀의 현실적인 면면이 대화 속에서 드러나는 것에 매번 마음 아파했다. 사귀게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애인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다면 아마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안타깝다 말했지만 거의 절망에 가까운 말처럼 들렸으니까.
연진은 그 뒤로도 한결같이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추위가 못 견디게 싫을 때는 애인과의 약속을 취소해버리고 만나서 길을 걷다가도 피곤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사람. 그녀는 몸이 아프면 며칠이고 집에만 있으면서 연락이 오래도록 닿지 않았고 이혼할 수도 있다는 생각 탓에 결혼에 대해서는 항상 비관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것들은 조금도 드러내지 않아서 그런 연진을 나는 꽤 어려워했다.
그래도 나는 연진을 사랑한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충분히 현실적이지 못해서가 아니고, 지나치게 가혹했던 그녀의 현실을 알기 때문이 아니고, 꽁꽁 언 얼음처럼 투명한 그녀의 뒤편으로 보이는 소소한 사랑과 애정 때문이다. 스스로를 조금도 꾸며 말할 줄 모르는 차가운 여자가 맞잡은 손 하나는 참 뜨겁다.
-Ho
2017년 11월 12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