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서른 네 번째 주제
어쩌면 1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전.
지금은 어색한 정장세트를 입고
낯설었던 첫 출근.
처음 대학에 갈 때보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보다,
두렵고 떨리고
설렜다.
하루하루가 눈코뜰새 없이
바쁜 지금은
상상할 수 없었던
기대감과 즐거움이었다.
오래도록 바라고 원했던 날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토록 색이 바래서
매일을 속상함으로 묻을까.
처음 출근을 하던 때
지금의 나태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도망치진 않았을까.
끝없는 의문을 던져본다.
그래도 나는 그날
첫 출근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도망칠 곳이 더이상 없던 때라서,
어딘가에 매어지길 바랄 때여서.
-Ram
작년 9월쯤 영어학원에 처음 등록하고 초급반을 3개월 정도 다닌 후 중급반으로 올라갔다. 그 당시 중급반 선생님은 진짜 어마어마하게 깐깐하고, 초급반 선생님과는 발음과 말의 스피드가 완전 다르고, 하루에 나눠주는 핸드아웃만 4~5장이였다. 무조건 그걸 다 외워야했고, 질문이 오면 대답도 3마디이상 꼭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였고, 항상 하이텐션을 유지한 허스키한 목소리는 우렁차게 교실을 울렸다. 그런 그녀의 수업에 난 항상 긴장을 해서 중급반 올라간 후 첫 한 달 동안 지각 한번 하지 않았고, 결석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내가 중급반 올라간 지 2개월정도 지났을 무렵, 갑자기 하루아침에 그만두었다. 추후에 듣기로는 학원 원장과 트러블이 있었고, 누가 잘못했고, 누가 잘못을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는 채, 원장은 남았고, 선생님은 떠났다. 그래서 한 달간 임시로 고급반 선생님이 중급반 수업을 맡았다.
그 뒤 새로운 중급반 선생님이 왔다. 비록 그녀는 첫 출근이 아니지만, 내가 학원에 다닌 후 그 날은 그녀의 첫 출근 날이였다. 그녀의 영어이름은 로즈였고, 로즈인 이유는 이름에 '장미'라는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얼굴만 봐도 먼젓번 중급반 선생님과는 완전 180도 다른 이미지였다. 수수한 얼굴에 마른 체형에 키가 크고, 목소리도 가늘고 여성스러웠다.
로즈의 수업은 항상 유쾌했고, 재밌었다. 재밌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루한 아티클이나 토론 비율은 적게 두고, 퀴즈 등 여러가지 액티비티를 많이 준비했다. 하루치 양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버려도 끝날 시간까지의 그 짧은 텀에도 다양한 퀴즈 등을 짧게 시도하여 지루할 틈이 없었다. 딱딱하고 진지한 구문이라던지, 약간 주입식 교육의 스타일은 아니였기에 수동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그다지 얻어가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하루는 로즈가 말했다. 하루에 이 짧은 한 시간동안 물론 얻어가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고, 전날 공부한 것을 이 수업시간에 계속 사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비록 그 날의 주제나, 그 날의 문맥과는 전혀 다르더라도 그냥 무조건 내뱉어야 한다고. 로즈는 이런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중급반을 3달 이상 다니자, 계속 남아있는 사람들이 남아있었고, 자꾸만 새로운 사람들이 드나드는 형태가 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3명이 내가 중급반에 올라간 이래로 계속 남아있었다. 사실 나머지 2명은 60대 할아버지와 40대 아저씨였다. 그 두 분은 내가 중급반으로 올라가기 거의 1년 전부터 계속 중급반에 있었던 엄청난 장기수강생이였다. 40대 아저씨 '오웬'은 항상 유쾌하고, 비록 유창한 영어는 아니지만 가끔씩 짧게 센스있는 문장으로 분위기를 좋게 만들었고, 60대 할아버지 '삼영(한국이름을 그대로 쓰신다)'은 영어 공부를 매일매일 하루 2시간씩 새벽에 일어나서 하시는 취미를 가진 분이였다.
어느 달은 새로운 사람들이 다시 또 학원을 그만두고 '삼영'도 당뇨가 있어서 잠시 한 달 학원을 쉰다고 해서, '오웬'이랑 나랑 둘만 로즈의 수업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때 아마 로즈와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고, 정이 들었던 것 같다. 그 후 새로운 달에 등록한 사람들이 잔뜩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로즈가 나를 많이 예뻐했다. 실제로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고 가면 큐트하다고 하질 않나, 염색을 하고 가면 뷰티풀이라고 하질 않나, 항상 내게 에너제틱하고, 밝고, 명랑하고, 유쾌하다고 하질 않나, 그리고 나름 내가 숙제를 열심히 해가자 (비교적 나는 숙제와 예습, 복습을 열심히 하는 축에 꼈다. 사실 직장인들이 거의 대부분인 아침 영어수업은 다들 숙제, 예습, 복습 할 시간이 없어 안해오는 사람들이 태반이였다.) 항상 나를 먼저 발표시켰다. 나도 그런 로즈가 싫지 않아서 계속해서 열심히 나름대로 공부를 했고, 그런 로즈의 칭찬에 같이 호응하고, 고마워했다.
그러던 어느날 로즈가 내게 그랬다. 나는 리사(내 영어이름이다)를 꼭 올해 여름에 고급반으로 올리고야 말겠다고. 그래서 나는 아직 내가 너무 많이 부족하고, 고급반 갈 실력이 안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로즈는, 물론 리사가 고급반 사람들처럼 유창한 영어를 하진 않지만, 어느날부턴가 리사의 말이 길어지고, 말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느끼고 고급반에 가면 더 많이 늘 수 있을거라고 날 다독였다. 그리고 3~4달 후, 로즈는 다음 달부터 내게 고급반에 가도된다는 말을 전했다. 초급부터 시작해서, 고급반까지 가는 것이 굉장히 기쁜 일이고, 설레고, 동기가 부여되는 건 사실이지만, 괜히 아쉽고, 그냥 또 아쉬웠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어느정도 했기 때문에 나는 나대로 계속 영어공부를 해야지라고 마음먹고 남은 중급반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중급반 수업이 딱 이틀 남은 날, 로즈가 말했다. 다음달까지만 학원수업을 진행하고, 그 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에 학원수업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아, 너무 괜히 아쉬웠다. 그렇게 나를 잘 챙겨주고, 예뻐해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선생님이였는데. 덕분에 자신감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하루하루 아침마다 명랑하고 발랄한 나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던 사람이였는데. 그래서 나는 로즈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선물을 고르진 않았지만, 꼭 내 마음이 가득담긴 선물을 해 줄 거다. 지금도 이런 상황이 괜히 서운하고, 뭔가 이렇게 기분이 좋으면서 아쉬운 이별은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서, (아마 두 번째일 것이다.) 마음이 오묘하다. 살면서 이런 좋은 이별을 내가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이 해야 할까. 시원섭섭하고 아쉽다.
-Hee
아무것도 아닌것 같았던 날들. 언제끝날지 기약없는 비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던 날들. 그 어떠한것도 약속할 수 없었던 나약했던 날들. 문득문득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지냈던 하루 하루. 내 길을 걷기위해 나답지 않은 날들을 버텨냈던 시간들.
드디어 첫 출근. 힘겨웠던 지난 날들을 떨쳐내려 내딛는 진짜 내 하루. 스스로 우뚝 일어서는 첫 날. 소중한 이들에게 격려받기 좋은 하루.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하루.
하지만 우리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채 눈치를 살피는 하루.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처음으로 현실을 맞이하는 씁쓸한 첫 날.
집에 돌아와서는, 한것도 없으면서 지쳐곯아떨어지는 하루.
-Cheol
버스 타고 오면서 너무 분한 일이 있었어. 중간쯤에서 할머니 한 분이 타시더니 곧장 나한테로 다가오시는 거 있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시는 거야. 나는 우리 할머니 생각도 나고 해서 당연히 비켜줄 생각으로 일어섰는데 그게 당연하다는 듯 앉으시더니 나흘 쳐다도 안 보더라? 그래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할 법 한데 말이야. 비켜주고도 빼앗긴 느낌이야.
사람들 상대로 장사해야 할 사람이 그런 걸로 분하면 어떡해. 어차피 몇 정거장만 더 가면 내릴 거리였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일단 스피커랑 코스기 먼저 켜줘. 그리고 큰 화분들 옮기는 건 내가 해 놨으니까 작은 것들만 좀 꺼내주고. 아침에 꽃 시장에서 산 꽃들 곧 배달 올 거야. 서둘러서 해야 해.
어제 개업식을 마친 꽃집의 이름은 어반 가든이다. 아버지를 따라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트럭에 실린 작은 화분들을 팔아본 경력이 있는 남자와 리본 공예를 배운 적 있는 여자가 함께 차린 꽃집이다. 정원이라고 부르기에는 작은 감이 있었지만 젊은 두 사람이 두 달 넘게 공들여 인테리어를 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가구들을 들여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게 만들었다. 꽃집 문턱을 넘어 서면 느껴지는 꽃향기와 푸릇한 색감이 도시 속비밀의 정원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근데 하루 종일 손님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어제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근처에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 없나? 가서 전단지라도 좀 돌리고 올까 봐.
이제 첫날인데 뭐가 그렇게 조급해. 개업식에 온 사람들은 우리가 초대한 지인들이었고.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곧 졸업시즌이라 바빠질 거야. 그때는 적당히 바쁘고 싶어질걸. 적당히 바쁜 게 좋아. 적당히 바쁘고 적당히 벌고 많이 놀면서 살아야지.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할까?
첫날부터 땡땡이 치자는 말씀이신가요 박 사장님?
굳이 말하자면 워크숍이죠 최 사장님. 비도 오는데 전집으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Ho
2018년 7월 1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