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서른 아홉 번째 주제
우리가 맞이하는 첫 여름이
이렇게나 따가울 줄은.
어제의 봄 같았던 시간은
따스해서 좋았다.
그 어제의 어제도,
그 오래전 날도,
춥거나 쓰리다고
네가 싫지도 않았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도
우리는 잘 이겨냈으니
이번 여름도 무사히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괜스레 웃는다.
사실
우리의 관계에
날이 덥고 찬 것이 무슨 상관이겠어.
그저
너와 즐거운 추억을 쌓을 생각에
적당한 핑계가 필요한 것 뿐인데.
-Ram
1.
언제부턴가 부모님과의 피서 날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나이까지는 엄마아빠가 여름휴가로 어딘가 가자고 권하면 우린 따르기 바빴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출발하고.
아빠가 휴게소라고 이야기하면, 뒷좌석에서 누워 자다깨 눈 비비며 일어나 차에서 내리기 바빴는데.
이젠 덩그러니 각자 혼자들의 휴가들만 남아있네.
2.
어딜 다녀와도 집에서 시원하게 복숭아든, 수박이든, 요플레든 먹으며
반 정도 누워서 티비보는게 제일 좋은 피서다.
3.
예전에 수원 정자동에 있는 학원에서 일할 때,
꿀 같은 휴가 3일을 받았지만,
그 꿀 같은 휴가 전날부터 냉방병인지, 감기몸살인지, 원인은 모르겠지만
열도 나(는것 같)고, (체온을 재보진 못했다)
몸이 (이불을 덮어도) 춥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며 아팠다.
덕분에 그 휴가의 피서지는 내 방 침대였다.
-Hee
"예약하셨나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숙박등록카드에 나의 이름을 적고 서명을 한다. 내 삶에서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피서지는 이 호텔이었다. 내 나라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 그 곳에 있는 6성급 호텔에서의 하룻밤. 내 꿈을 시작하던 초기에 지냈던 고시원의 한달 숙박료. 그 금액을 훌쩍 넘어서는 하루 숙박비는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부'라는 기준으로 펼쳐진 스펙트럼. 그 끝자락에 있는 이 곳은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색일지도 모르겠다. 가상의 인물일지라도 잭이라는 인물이 타이타닉에 탑승할때 기분이 이러했을까? 그러한 내용을 묘사한 작가의 감상도 그러했을까? 이 곳에서의 내 잔의 색깔은 어떠할까? 어떠한 색을 내 잔에 담고 살아가야할까?
내 삶의 여정에서도, 이번 여행의 일정에서도 이 곳에서의 하룻밤은 중요한 이정표가 될것이라 생각해본다.
-Cheol
부서를 이동하게 되면 나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진숙을 만나러 서울 가는 일이 잦아져 다음 주소는 서울로 옮기는 게 어떨까, 말 같지도 않은 생각에 꽤 많은 시간을 들인다. 금요일 찜통 같은 이태원에서 수원 가는 막차가 끊어질 때까지 나는 진숙과 술을 마셨다. 걔는 술을 같이 마시는 사람들 분위기 안 흐릴 정도로만 마신다더니 소주 세 병 먹는 내 템포에 지루함을 느꼈고 나는 진숙의 손목이 꺾이는 리듬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작은 체구에 저렇게나 빠른 리듬이라니 지금 제정신인가 싶었고 날은 덥고 정신은 옅어지고 이제 우리 그만 막차 타러 흩어지자고 했다. 나는 여전히 늦은 시간 서울은 무섭다고, 집엔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이다지도 많은 버스가 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더니 진숙은 내 소매를 잡고 더운 바람조차 한 점 없는 이태원에서 남산으로, 또 잘 안다는 종로로 자꾸만 걸었다. 서울 공포를 없애주겠다나. 밤새 걸었다. 걷다가 보이는 은행을 지나치지 않고 들렸고. 살 것도 없으면서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나오는 한기로 얼굴을 식혔다. 아니 이건 좀 민폐가 아닌가 싶어 말을 하려고 보면 돈은 뽑지도 않으면서 ATM 앞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미소로 반겨줬고 편의점 알바는 더 있다가 가라고, 자기도 심심하다며 말을 걸어왔다. 이게 서울의 피서인가. 밤이 무서우면 아침에 첫 차 타고 가라는 건 좀 이상하고 우습지만 인중에 땀 맺혀가며 서울의 너그러운 피서를 알게 해준 진숙이 고마웠다. 산은 힘들게 100미터 올라도 고작 0.7도 떨어지는데 은행도 편의점도 문만 열고 들어가면 히말라야다. 여름이 조금 덜 싫어지려고 한다.
-Ho
2018년 8월 5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