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마흔 아홉 번째 주제
나는 그렇게 특별한 인물은 아닌데
무엇 하나에 꽂혀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럽다거나
신기한 느낌을 받는다.
직업이 아니어도
흔히 말하는
아이돌이라던가,
취미라던가,
커피라던가,
그런 것들 말이다.
나는 여지껏 무엇하나
빠져본 적 없이
무난하고 말랑한 시간을 보내왔는데
대충 그 이유를 대자면
1. 귀찮으며
2. 싫증이 나고
3. 좋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였다.
몇 년만의 콘서트를 여는 가수처럼,
오래도록 손님이 오는 단골집처럼,
그렇게 하나에 오랜기간
정을 쏟을 마음의 여유가
내가 아직 그런 여유가
낭만이
없어서인 것은 아닐까.
조금 슬퍼지는 날이다.
-Ram
그래 어쩌면 너같이 변하지 않는 물건들에게 빠져버린다면 오히려 덜 상처 받겠다.
물론 생명이 아닌 것들과는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여전히 생각은 들지만.
난 사실 물건에게 그다지 미련이 없어.
뭐, 받은 편지, 선물, 의미있는 책 등은 물론 내게 소중하지만 말야.
언제부터 미련이 없어졌나 생각해보면,
고등학교때, 그것도 대학교 첫 수시를 보러가는 아주 중요한 날 아침에,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누가 교실에 들어와서 내 가방 안에서 지갑을 훔쳐갔던 것 같아.
내가 학교에 오려고 버스에서 내렸던 그 사이까지만해도 지갑이 있었으니 말이야.
내가 교문에서 교실로 걸어오는 중간에 떨어트렸을 가능성은 엄청 낮은 것 같고.
더구나 그 지갑은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명품지갑이였다?
엄마가 해외여행 다녀오면서 사준 지갑이였어.
사실 우리 엄마가 명품을 딸에게 덥썩 내미는 사람은 아니지만,
동남아 길거리에서 SSS급으로 사왔을지도 모르지만,
엄마가 명품이라고 하며 자신있게 내미는 지갑이였지.
그 안에 카드들이나, 현금 3만원이나, 뭐 그 따위들은 다 훔쳐가도 좋았어.
근데 그 지갑이 괜히 너무 아쉽고 아쉬운거야.
근데 어쩌겠어.
내가 엄청 아쉬워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속으로는 '제발 안에 내용물은 모두 없어도 좋으니 지갑만큼은 다시 돌려줬으면.'이라고 바랐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그때부터였던것 같아.
물건에 정을 붙여도, 그 물건은 닳기 마련이고, 어느날 잃어버릴 수도, 고장날 수도 있잖아.
그때마다 내가 내 아쉬움을 견디지 못할 것 같은거야.
그래서 난 별로 물건에 미련이 많이 없는 편이야.
넌 그것들이 너의 인생의 낙이라고 내게 말했지.
그래. 저마다 가치가 다를 수 있으니. 이해해.
하지만 그 말들이 반복되고, 반복될수록,
나도모르게 조금씩 소외감까진 아니지만 뭔가 비스무리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너의 낙은 내가 되었으면, 했거든.
내가 너의 삶 어떤 부분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했고, 빛이 되었으면 했고, 기분좋은 산들바람이 되었으면 했거든.
하지만 나와 함께 있을땐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 널 보면서,
그다지 내게 큰 미련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널 보면서,
나는 너에게 그다지 소중하고 아끼는 존재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무 말도 못하고, (그래서 네가 더 좋아할지도) 물건들따위에게 지극한 정성을 주는 마음이 더 소중한 너에게.
-Hee
그가 자기 나름대로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있었지만 그렇게 술없이는 못사는 사람인줄은 몰랐다. 술에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없는 그는 무엇을 채우고 싶은걸까? 스스로 온전하지 못한 그는 무엇을 포기하고 사는걸까?
우리는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포기하며 살고있을까?
-Cheol
우리 집에 출입문은 두 개인데 고양이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은 그보다 세 개 더 많다. 그간 집 마당에 상주하는 길고양이들이 집 안으로 들어온 경우는 없어서 몰랐는데 이세가 벌써 몇 번이나 집을 벗어나 사라진 걸 찾으며 알게 됐다.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이세가 마중 나오지 않으면 십중팔구 집 밖으로 나간 것이다. 처음에는 마당에 있는 고양이와 유리창 너머 시선만 마주쳐도 깜짝 놀라 방 안으로 우다다 뛰어 들어오던 겁쟁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겼을까. 집을 벗어난 고양이는 하룻밤에만 20km도 넘게 이동할 수 있다는데 이세는 다행히 멀리 가지 않았다. 장독대 위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옆집의 치즈 고양이들 사이 시꺼먼 것이 원래도 있던 것처럼 어울려 앉아 있는다. 그러다 자기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꼬박 대답도 하고 집으로 알아서 들어온다. 이렇게 집 밖을 좋아했었니. 그간 영역 동물이라고 너를 집 안에 둔 게 가둬둔 거랑 다를 게 없었구나. 언젠가 아침 집 앞에 차에 치여 죽어있는 고양이를 생각하면 그런 미안한 감정도 곧 사그라들었지만. 어제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이세가 보이지 않았다. 여태껏 그래왔듯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는 기대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안한 것도 아니었다. 선 채로 가만히 있는데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게 느껴졌고 마음이 점점 더 다급해졌다. 대개는 금방 찾을 수 있었는데 밤새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멍청한 놈 집 나가면 고생인 것도 모르고. 이번에 찾으면 집 안에서도 하네스를 채워둬야지. 전단지를 먼저 만들고 내일까지 못 찾으면 고양이 탐정에게 의뢰를 해야지. 침대에 누워도 얼굴로 쏟아지는 해에 눈이 시려 잠들지 못하고 있는데 이세가 폴짝 뛰어 배 위로 올라왔다. 도대체 어딜 갔다 이제 왔어. 밥이 마음에 안 들었어? 궁둥이 만져주니 좋다고 그르렁 거리는 너를 도대체 어떡하면 좋겠니.
-Ho
2018년 10월 14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