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아흔 여섯 번째 주제
나는 구두를 신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지 뭐야.
높고 뾰족한 구두가
예쁘고 멋진 언니들의
전유물인줄 알았어.
삐딱한 걸음걸이마다
복숭아뼈가 어긋나는 줄도 모르고
급한대로 뛰어나가는
또각소리가
아플줄도 모르고.
그대로 어른의 멋진
상징인줄만 알았어.
매일 아침 나는
구두에 발을 욱여넣고
온 하루를 지탱하고 있다.
내 하루가 고될수록
구두도 엉망진창이 되어간다.
언제쯤 이 잣대에서 내려올 수 있을지
고집을 부려보지만
그마저도 나는
쳇바퀴 속에 있는
그냥 그런 사람인걸.
어른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걸
알았더라면
하지 말 걸.
-Ram
엄마는 무지외반증이 심하다. 젊었을 적에 직업상 힐을 많이 신고 다니셔서 엄마의 발모양은 기형적으로 변해버렸다.
(나도 요즘 무서워서 힐과 운동화와 로퍼를 골고루 번갈아 신는다. 아직 높은 굽을 완전히 포기할 순 없다...)
그래서 항상 오래 걸으실 때마다 불편하고, 또 무지외반증때문에 튀어나온 부분이 빨개져있다.
그런 엄마에게 처음으로 가격은 생각하지말고 이것저것 신어보고 편하게 신발을 고르라고 했던 올해 어버이날.
엄마는 몇 년 전, 구두상품권이 생겼다며, 아빠에게 구두를 사줬다. 아빠는 그 구두를 밑창이 떨어지고, 뒷 가죽이 헤질때까지 신고 다니셨다. 그 비싼 구두가 못 신게 될 즈음 인터넷쇼핑에 익숙해진 아빠는 (냉장고도 온라인으로 사셨다지. 최저가로 샀다고 좋아하셨다) 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일명 브랜드없는 구두를 신으셨다. 내가 집에가면 이 구두 싸게 샀는데 이쁘지 않냐며, 자랑을 늘어놓으신 아빠. 그런 아빠에게도 비싸진 않지만 꽤 괜찮은 구두를 선물해드렸다.
우리 아빠도 꽤나 취향이 있기 때문에, (그냥 아무 구두나 괜찮다고 신지는 않으신다. 나름 아빠 기준에서 예뻐야 한다.)
직접 아빠를 모시고 가서, 아빠가 직접 신어보고, 걸어도 보고. 그래서 고른 구두라서 더 뜻깊다.
나 역시 지난 10년을 힐을 고집했었다. 덕분에 수차례 구두 때문에 굳은살도 생기고, 발톱도 빠져보고, 발가락도 그리 예쁘지 않다. 이제는 조금씩 힐에서 내려오는 시간이 많아졌다. 제일 큰 계기는 일주일에 한 번 자세교정 PT를 받고 있는데, 내 발과 발목이 힐 때문에 많이 약해지고,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이 온 몸으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신발장에 높은 굽의 구두들이 많지만, 언젠가는 적어지는 날이 올 것 같다.
-Hee
새 구두를 한켤레 샀다.
아무래도 운동화를 신고 나가기에는 우리 사이에 격식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켓을 하나 걸친다든지 검은 구두를 신는다든지 말이다. 무던한 것이 좋으나 그렇다고 너무 구식이고 싶진 않고 나름 단정히 신경쓴 티가 나도록 챙겨입기.
언제부터 내 옷들과 구두가 이렇게나 허름해졌던 걸까싶었다. 돌이켜보면 내 유일한 구두는 이미 굽을 두 번이나 갈았고 비가오나 눈이오나 4년이나 신었던터였다. 당시에 꽤나 좋은 품질이었음에도 모질었던 내 사회 초년기를 버틸대로 버텨준 구두. 가죽이 헤지고 갈라지고 까인 부분을 보니 이제는 정말이지 보내주어야지 싶었다.
그렇게 새로 산 구두를 하루? 이틀이나 신었을까? 내 발에 길들지 않은 새 구두는 고통 그 자체였다. 눌리고 멍들고 까지고...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건 이런것일까? 조금 조심스럽고 생소한 우리 사이도 차차 서로에게 길들여져 갈까?
누구나 알법한 뻔한 구두 이야기.
-Cheol
지금 입고 계신 청바지에도 굉장히 잘 어울리네요.
그래 보여요? 그럼 이 구두로 할게요.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지만 당장 급하게 구색을 맞춰야 될 일이 생겨 검은색 옥스퍼드 단화를 한 켤레 샀었다. 살면서 두 번째로 내 돈을 주고 산 구두였다. 첫 번째는 중학생 때 샀던, 말도 안 되게 뾰족하고 화려해서 이탈리아 남자들도 어지간해선 소화할 수 없을만한 구두였기 때문에 신발장 구석에 오래도록 머무르다 어느 순간에는 없어졌다. 패션의 시작은 남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던데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검열하는 스스로에게 매번 걸려 구두를 잘 신지 않았다. 옥스퍼드 구두도 장례식장에 몇 번, 결혼식장에 몇 번 신고 간 게 다였다. 가끔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에 꺼내 입는 갈색 체크무늬 트위드 재킷을 제외하곤 구두와 맞춰서 입을 만한 옷이 없었고, 발이 딱딱한 가죽에 눌리고 쓸려 불편하고 때로는 아픈 게 싫었다. 게다가 구두라니, 아무래도 나와는 정말로 안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을 빌려 입은 듯한 어색함이라니. 오랜만에 결혼식장에 갈 일이 생겨 구두를 다시 꺼내고 약을 발라 광택을 내두었더니 고양이가 갖고 놀다 못 신게 되어버렸다. 고양이도 구두는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Ho
2019년 9월 8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