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열 두 번째 주제
그런 날이 있다.
문득 내가 잘 지내는 게 맞는지,
이런 날을 살아가는 게 맞는지
알 수 없는 날이.
나는 껍데기만 다 큰
어른 모양을 하고선
사실 어린애라고.
나는 아직 된장찌개 간을
50프로도 맞출 줄 모르는
애송이라고.
그런데도
자꾸 나를 어른이라고 부른다.
나는 겨우
30년 남짓을 살아왔는데도.
너무 많은 시간을 살아버린 것처럼
불리울때
숨고만 싶어진다.
-Ram
1.
예전에는 내 몸통만한 작은 상을 펴놓고,
오밀조밀하게 그릇에 카레와 교자만두를 담아
음료수 놓을 자리는 없어서 바닥에 두고
옹기종기 앉아서 먹었는데.
이젠 그 카레를 높은 천장이 있는 집에서
한 상 가득 차려도 자리가 모자르지 않는 유리식탁에서 먹을 수 있다니
기분이 묘해.
옹기종기 느낌이 사라지긴 해서 약간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바로 옆에 붙어서 먹을 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해.
2.
당근잠옷을 샀는데,
글쎄,
생각해보니 당근잠옷을 입는 사람들이 모두 30대인거지.
30대에 당근잠옷 조합이 생각보다 귀엽더라.
입는 사람들도 예상외로 잘 어울려서 뿌듯해.
3.
10년이라니.
내 생애 이런 시간들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10년이 지나도 너무 그대로인것만 같아서
지나간 시간들이 무색해.
나이라고 하는 숫자들이 어색해.
-Hee
시간과 시간을 거쳐
결국 도착했다
언제나 바라 마지않았던 순간
방황했던 때에 내가 바랐던 내 모습
이 시간과 장소에 머무르기
내가 몰랐던 이들과 함께하기
이제는 서로 의지해 함께 나아가기
바뀌어가는 세상에서
필요한 공간 채우기
시간의 틈 메우기
달라진 세상을 마주할 때
우리 마음이 궁핍하지 않게
달라진 세상 속에서도
이 마음이 가 닿게
-Cheol
1.
어제는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일에 참 놀란 하루였다.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클 때는 머릿속을 서성이다 입속을 맴돌고 다시 되돌아가기만 했던 말이었는데 참 쉽게도 나와버렸다. 혜미는 좋은 사람이지만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는지도 모르겠다. 태백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좋아한다 말했고, 그리고 아직은 내가 마냥 동생 같기만 하다는 말을 듣는다. 무엇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득해지고 온몸에 무기력이 감돌았다.
다 잃은 것 같은 마음 역시 전과는 달리 금세 괜찮아졌다. 아픈 마음을 달래려 하지 않았는데도. 사랑이 전부라는 것에 열렬히 고개 끄덕이지만 늘 사랑은 낯설다. 혜미는 좋은 사람이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 사랑은 전부였다가 이제는 별것도 아닌 것이 되기도 하나보다.
2.
개인적인 슬픔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까 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도시를 한 바퀴 걷고 난 70km 뒤에 나는 며칠 전의 잔잔함을 되찾은 사람이길 바랐다. 밤새 혼잣말을 많이 했다. 너무 성급했어. 네가 봐도 너는 별로인 사람이잖아. 너를 누가 좋아해 주겠어. 나는 끊임없이 나를 나무랐고 또 위로했다. 좋아하고 싶은 마음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언젠가 더 커질 거야. 새벽이 지나 어스름한 하늘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내려왔다. 정류장에는 고작 절반을 걷고도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된 내가 서 있었다.
-Ho
2019년 12월 29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