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서른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어릴 땐 그랬다.


뭐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세상을 채울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더라.


어른이 되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쉽게 깨어지고

상처받고 유약하다.


나는 4천원짜리

소주 몇 잔으로도

눈물을 한 통 쏟아버리는

작은 존재일 뿐이었다.


언제 어른이 될 수 있냐고

엄마품을 붙잡고 물었던 날,


너는 영원히 내게

아이라고,

걱정말라는 그 목소리를

나는 여전히 붙잡고 있다.



-Ram


정말 기분 좋을때만 하나도 쓰지 않은 술.

불광동에 출장갔을때 불광시장에 있던 옛날 순대국 집으로

(나머진 원래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라 나만 잘 모르던) 8명정도가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10월 말이라 쌀쌀했지만 순대국집 안에는 솥에서 육수 끓이는 냄새가 솔솔 나서 그런지 공기가 후끈했고,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순대국 냄새를 맡으니 자연스럽게 생각나던 술.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 소곱창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목청껏 떠들며 홀짝홀짝 마시던 술.

말레이시아에서는 9천원정도 하는 술.

예전에 아는 선배가 평택역 앞 홍콩반점에서 알려주던 칭쏘비율이

지금까지도 인생비율이 되서 항상 그 비율대로 맥주와 섞어 먹는 술.

신입사원때 우리팀만 야근을 했는데 일이 끝나고 대표가 순대국집에서 한 잔씩 돌리던 (맛없던) 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진짜 너무 쓰고, 맛이 없어서 한 모금도 마시기 싫은 술.

우정인 줄 알고 만난 사람과 연남동의 어느 바에 앉아서 토닉과 섞어마셨던 25도정도 되었던 증류수 술.

맥주보다 소주를 더 좋아했던, 그리고 정말 잘 마셨던 예쁘고 귀여운 친구가 생각나는 술.

괜히 빨갛고 얼큰한 국물이나 과자랑은 먹기 싫은 술.

이 술을 굳이 안마셨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 저녁에 4-5년 전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친구랑

학교 앞 삼거리끝 술집에서 새우머리버터구이와 마셨던 술. (청하도 소주라고 하긴 좀 그렇나?)

지금 생각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마시자고 하고 싶은 술.



-Hee


벅찬 순간들이 있다. 회사도, 나도, 가족도. 때로는 그 벅참을 당최 풀 길도 없다. 그럴땐 소주를 찾는다. 혼자서 마시든 누군가와 함께 잔을 기울이든.. 소주만 한 게 없다.


딱히 별말은 없어도 좋다. 그저 묵묵히 서로의 잔에 잔을 채우는 것만으로 서로가 할 도리는 다한 것이니께. 방탕해진다거나 도망치기 위해서 마신다기보다는 털어내기 위해 마신다. 그걸 또 티를 내듯 한 잔 한 잔 소주를 입에다 탈탈 털어 넣는다.


털어 넣는 소주가 한 잔, 두 잔 늘어나면서 차츰 정신이 뱅뱅 돌기 시작하는데, 이때 중요한 건 털어낼 만큼 털어넣되 다음날의 스케줄은 아무 일 없었단 듯 감당해내야 한다.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취할 줄 알되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묵묵히 부딪히는 잔 속에서 일종의 동지애는 싹트고, 묶은 건 그렇게 털어놓고 내일로 나아간다.



-Cheol


1.

소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치고는 여태 많이도 마셨다. 술이 얼마나 사람을 망치는지 소주를 통해 배우기도 했다. 내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구린 사람이 되고 난 뒤에나 깨달았지만 말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제를 불안해하는 일도 완전히 질려버려서 언젠가 하루는 소주를 마시지 않기로 했었다. 술병이 날 때마다 초록색은 쳐다보지도 않으며 오늘부터 술 끊는다 말했던 것과는 다르다. 술이 아니라 적어도 소주는 일절 마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즐기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마냥 취하기 위해 들이붓는 술, 싸구려 희석주, 알콜 향 밖에 나지 않는 소주의 어디가 부드럽고 순한지, 어떻게 깔끔하고 상쾌한지 이제는 더 궁금해하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2.

절제를 잘 하지 못하는 편이라 괜찮은 술이 매대에 저렴하게 놓인 것을 보면 그냥 하나씩 집어왔다. 해외라도 다녀올 때면 술을 사지 않는 동행인에게 부탁해가며 몇 병씩 사와 집에 놓고 마셨다. 두고두고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술에 아낀다는 개념이 유독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던 탓이기도 하고 술을 즐기는 일과 취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던 탓이기도 했다. 퇴근하면 그냥 한 잔. 외출하기 전에도 한 잔 스트레이트로 삼키곤 했다. 캠핑이라도 가면 하루에도 몇 병을 마셨었다.


소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결정이 다행히 잘 지켜지고 있고 내가 나를 통제하는 생활에 대한 갈망이 조금 더 짙어지면서 소주가 아닌 술을 마시는 일도 많이 줄었다. 굳이 술을 사두지도 않게 됐고 술을 마셔도 한두 잔을 아껴가며 마시고는 더 손을 대지 않는다. 여럿이 둘러 앉아 술마시는 자리에서 물이나 홀짝대고 있을 때면 정말 괴롭기도 한데 그래서 술자리를 처음부터 피해버리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다. 마음같이 되는 게 잘 없는데 뭐라도 하나 잘 되려는 것 같아 괜히 자신감이 조금 생긴다.



-Ho


2020년 5월 3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불필요한 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