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마흔 한 번째 주제
잔뜩 구겨진 옷가지들
형체를 알 수 없게
뒤엉킨 양말, 셔츠 같은 것들 사이로
웅크리고 있던 감정.
작은 빛 한줄기가
그 공간을 더 오묘하게 만들었다.
너를 잃은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잃었다.
내가 두고 온 것은
한 줌 거리도 안되는
자존심.
그렇게 작고 가냘픈 것을
그렇게 품고 도망칠 때에
나는 나를 잃지 않았다고
되뇌이는 밤.
저녁, 감정, 자존심
이런 것들이 잔뜩 구겨진
어느 날의 나.
-Ram
1.
다림질을 못하겠다.
어떤 블라우스를 세탁기에 빨면
매우 쉽게 구겨지는 원단을 가졌던데.
다림질 그게 뭐 어렵냐 하겠지만
내겐 어려워..
그래서 구겨진 블라우스 3-4개를
집 앞 세탁소에 맡겼다.
세탁도 필요 없고 그냥 다려달라고만 했는데
다행히 다려준다고 했다.
세탁소 직원이 나보고 옷걸이가 필요하냐고 묻길래
집에 옷걸이 많으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이게 큰 실수였다.
약속한 날 블라우스들을 찾으러 가보니
곱게 다려진 블라우스들이
큰 세탁 봉투 안에 접혀져서 (^^) 밀봉이 되어있었다.
집에 와서 밀봉된 봉투를 뜯어 블라우스를 꺼내었더니
역시.. 몸통 부분은 접혀진 모양대로,
팔 부분들은 또 다른 모양대로 구겨져있었다.
헤헤.
난 왜 세탁소에 다림질을 맡긴 걸까.
쉽게 구겨지는 원단을 가진 블라우스들은
다시 옷장 속에 고스란히 걸려있다.
스팀다리미 작은 건 예전에 써봤는데 그건 그거대로 어렵던데..
음.
모르겠다.
2.
사실 그때 답장을 하지 못한 건,
내가 네게 또 빠질까 봐.
근데 넌 그 이후로 다시 연락하지 않더라.
단 하나의 메시지도 없더라.
넌 너대로 마음이 구겨졌을지도 모르지.
난 나대로 마음이 구겨졌고.
3.
천장만 보고 누워있던 적이 있었지.
너무 어이없고 허무하고 슬프고 원망스럽고
바깥 날씨는 이렇게 좋고 반짝이는데
나만 이렇게 있어야 하는 게
너무 화가 났었지.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속에 화가 많이 나서
사람이 화병이 나는구나 싶기도 하고.
그깟 감정 상한 게 뭐 대수라고
누구 하나 굽히지 않고 뻣뻣하게 곧추세우며
서로를 마구 물어뜯으며
그렇게 어느 여름날을 보낸 적이 있었지.
여름날이 오면 하고 싶었던 모든 계획들은
다 물거품이 되었고,
시간이 아까워서 속이 타들어갔었지.
그땐 고민이 많았다.
그때만 그런 것인지,
또는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
4.
그렇게 들으라고
신나게 드럼을 두드리고
베이스를 튕기지만
애써 외면한다.
외면해버린다.
완벽하게 구겨진 내 모습이
그 음악에 투영되어 보일까 봐.
그 모습이 거울처럼 내 앞에서 서성거릴까 봐
그냥 외면해 버리고 만다.
-Hee
'오늘은 이 옷을 입으려고 했는데.. 구겨져서 정말 어쩐담;;'
'조금 구겨졌어도 충분히 이쁜걸? 어떻게 항상 완벽할 수 있겠어~ 괜찮을거야 보기 좋다'
'반듯하고 싶은 마음인걸.. 아무것도 모르면서.. 됐어 하나도 도움이 안돼. 내가 알아서 할게'
'그.. 그래'
그렇게 못난 말들만 내뱉어내던 때가 있었다. 나 밖에 모르던 시절. 우리 삶은 이웃이 모여 하나의 작은 공동체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새까맣게 까먹고 철 없었던 시절. 그렇게 온통 구겨진 마음으로 가득하던 시절에도 곁에서 서로를 달래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왜 꼭 뒤늦게 알아차렸을까?
감사한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도움을 줘야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 함께하는 나의 모습. 함께할 우리. 서로 보듬어줄 우리. 지켜야 할 것들. 그런 우리를 지켜주는 울타리. 우리의 둥지를 하나 하나 가꾸어 간다. 어두운 삶이 가득한 사회 속에서 그렇게 작은 희망을 가꾸어가보자.
우리 함께.
-Cheol
이 새끼가 누구 인생을 조지려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치며 내뱉은 엄마의 말에 모멸감이 들었다. 결혼을 할 거라면 그전에 동거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나는 순간 기분이 더러워져서 같이 밥은 더 못 먹겠다 말하곤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아무 말도 통하지않는데 일단은 더 큰 싸움을 피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모멸감은 손찌검을 당한 데서 왔을까, 그게 아니라면 동거에 대한 내 생각이 반드시 누군가의 삶을 망가트릴 것이라 확신하는 말에서부터 왔을까. 둘 다일 테다. 뒤늦게 걸려온 전화는 씹었다. 구겨져버린 감정이 그렇게 했다. 동거를 생각할 만큼 좋아하는 사람의 인생을 내 손으로 조지고 싶냐니, 어떻게 생각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이 구한말인가, 그리고 동거는 혼자서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었던가.
-Ho
2020년 7월 19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