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마흔 두 번째 주제
우리집에는 앞치마가 여러개 있다.
가게일을 하는 엄마가 쓰는
빨강 파랑 초록 앞치마.
태어나서 앞치마는
그런것만 있는 줄 알았더니,
나중에 보니 프릴이며,
꽃무늬며 예쁜 것들이 많다는 게
어찌나 어색하던지.
우리 엄마가 쓰는 앞치마는
대체로 얼룩지고, 쿰쿰하다.
몇 년 전,
해외에서 패턴이 요란한 앞치마를 사서 엄마에게 선물로 주었다.
엄마는 기념품까지
일 할 때 쓰는 것을 주냐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몇 년을 그 앞치마를
꺼내지 않았다.
얼마 전,
집에 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 앞치마를 한 엄마를 보았다.
"얼룩 지면 아깝잖아."
-Ram
1.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벽증이다.
내 블라우스 소매가 책상에 닿는 것.
내 하루에 대부분은 키보드를 칠 일이 많은데,
그때 내 옷 팔 소매가 책상에 닿는 것이
너무 싫다.
닿지 않게 하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위에 무조건 사무실용 긴 소매 겉옷을 입거나
팔만 끼우고 키보드를 친다.
손목을 아예 들고 칠 수는 없으니.
그 향수를 뿌린 팔목 안쪽이 어딘가에 닿는 게 너무 싫다.
소매가 짧은 옷을 입어서 팔목이 그대로 드러나 차가운 책상에 닿는 것이 싫고,
긴 소매 옷을 입더라도, 그 긴 옷조차 닿는게 싫다.
그렇다고 내 책상은 항상 닦아서 먼지 한 톨 없을 텐데,
그래도 싫다.
에어컨이 추워 가져다놓은 사무실용 옷은
내 팔목과 그날 입은 내 긴 옷소매를 지켜주는 데에도 쓰인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대충 짐작은 하지만
이렇게 강박이 생겼을 줄은 몰랐다.
어느샌가 내 안에 자리 잡은 이상한 결벽증.
2.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그런 중요한 곳에 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길 바랐는데
희미해지는 줄 알았는데,
아직은 눈에 휘이 보이는 얼룩.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지길 기다렸던
얼룩이 다시 눈에 들어오자
식은땀이 나고, 숨이 막히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그런 얼룩.
3.
꿈도 죽음도 정처가 없네
가는 데 없이 잊혀질 거야
우리는 여기에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다 사라지고 밤 뿐이네
페르소나, '밤을 걷다' 중
4.
그동안 되게 우스웠던 건
내 옷도 아닌 그 옷에 누군가 무언가를 흘렸고
세탁을 여러 번 했는데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런데도 나는 그 옷을 옷장 속에 여러 해나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
너무 참담하기 그지없네.
어디에 예쁘게 입고 나갈 옷도 아니면서.
얼룩이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나 겨우 입고 나갈 정도였는데.
그 옷이 뭐라고. 5년도 넘게 가지고 있다가 버렸냐는 말이야.
사실 돌이켜보면 옷의 주인인 너의 마음과는 달리
난 그 옷을 꾸역꾸역 열심히 입어가면서
어떤 풍파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날 스스로 보고 싶었나 봐.
이제는 서로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서로에게 긁히고 긁혔던 부분들이
저 깊숙한 무의식 속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무의식까지도 꿋꿋하고 싶었거든.
어떻게든 난 내 방식대로 살아가고 싶었거든.
-Hee
아무리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걸어왔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걸어온 지난 5년은 그야말로 다양한 것들로 얼룩져있었다.
시작할 때에 바라보았던 목적지에 기어코 도달했지만 대부분의 상황이 처음 마음먹은대로 흘러왔던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경험들과 감정들에 이곳 저곳 얼룩진곳 투성이었고 막상 도착하고나니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다시금 고민해야만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이 얼룩들을 다 어쩐담..
얼룩진 세탁물에 바라보듯 얼룩진 마음을 바라보며 어디서부터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봐야하나 난감해하는 내가 서 있다.
망설이는 내가 서 있다.
-Cheol
경량 하이킹 브랜드의 방향성이라는 게 결국 한 점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는지, 아니면 일본의 스타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괜찮은 등산복을 구할 수 있다. 기존의 헤비 듀티를 주장하던 브랜드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보다 가볍고 그래서 보다 약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도 가격은 대를 물려서까지 입을 수 있다는 등산 의류들과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비싸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일상생활을 할 때 입어도 큰 괴리감이 들지 않는 톤 다운된 색상에 모던한 디자인이라 최근에는 주야장천 그것들만 입고 다닌다.
옷장에는 등산복밖에 없으면서도 산에 가지 않을 때는 등산복을 입지 않으려던 노력들도 최근에는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편한 데다가 누가 봐도 등산복 같지 않은 옷들을 전투복처럼 늘 입고 다녔다. 미끄러져 넘어지며 생긴 헤짐, 찢어짐 들. 나무와 풀의 진액이 스며들어 색이 변한 얼룩들. 섬유에 남겨긴 상처와 얼룩 하나하나마다 타투처럼 의미가 부여된다. 자연인들이 하나같이 볼품없는 옷을 입고 다닌 이유도 이랬을까.
-Ho
2020년 7월 26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