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쉰 한 번째 주제
좋아할 수록 작아지는 존재,
나를 숨겨야만
너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내게 이렇게 큰
짐이 될 줄 몰랐어.
사랑으로만 감정으로만은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때는 정말 몰랐어.
내가 너무 작고 초라해서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우리는 좋아했고, 아꼈고,
사랑의 그 어디쯤에 있었지만
우리는 사실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여름날의 신기루같이
있어도 있지 않은
그런 존재.
좋아했었고 아꼈었고
아파했던 그런 사람.
-Ram
1.
일주일 내내 다이어리를 펴보지 않은 적이 있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하나의 이유는 사색이나 성찰 따위를 하기 싫었기 때문이지. 다이어리를 펴는 순간 무언가 마음이 경건해지고, 시간에 대한 마음가짐과 산다는 것에 대한 비장함, 앞으로 더욱 잘 해보고 싶다는 욕심 등이 한꺼번에 밀려오게 되는데, 그런 것들이 밀려오게 되면 결국 현재의 나, 과거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 대해 다시금 성찰해보거나, 사색해보는 시간까지 갖기 마련. 그런 프로세스를 거치다보면 내가 잘하지 못했거나, 잘 대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현타가 오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은 만큼 자존감이 떨어질 때도 있고, 얼굴이 붉어질 때도 있는데 그런 나와 마주하기 싫었기 때문에 다이어리를 펴보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아무도 검사를 하지도 않는데) 내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다이어리에 매달 그 약속들이 적혀있는데 - 이번 다이어리는 친절하게 무슨 습관달력같은게 있어서 매달 첫 장에 약속 비스무리한 것들을 적게 해뒀길래 이왕 그런 자리가 있는거 또 비워둘 성격은 아니라 매번 적게됨)에도 다이어리를 나도 모르게 외면하게 된다. 마치 숙제 안해간 꼬맹이마냥. 음. 그래도 그런 날들이 있으면 다시 다이어리를 펴고 성찰하고 싶은 날들도 있기 때문에 또다시 나는 다이어리를 편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생각을 적어 내려가고, 가까운 미래에 생긴 계획들을 적어나간다.
2.
말레이시아에 있으니 한국 계절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내내 여름이라 더욱 마음의 여유, 여름의 여유따위가 저절로 생기게 되는데, 한국을 보면 어느 순간 따뜻한 계절이 오고있다고 하더니, 장마와 태풍으로 종일 비가 내리기도 하고,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약간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었다. 정말 너무 빨리 바뀌네. 매번 그 빠른 계절들을 나는 어떻게 맞이했었을까. 정신없이 변하는 계절들을 맞이하고, 적응될 때쯤 또 새 계절을 맞이하고. 그것에 쏟아부은 감정들도 꽤나 많았던 것 같다.
-Hee
선선한 가을.
여느때와 같이 돌아온 점심시간.
김치찌개삼겹살 하나 시켜 같이 먹자는 동료의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회사를 나왔다. 아이스 커피 한 잔 사서 벤치에 앉아 시간을 달래는데 문득 바늘로 콕 찌르면 터질 듯 감정이 차오른다.
무엇이 그리도 서운할까.
무엇이 그리도 서러울까.
무엇이 그리도 무서울까.
어른의 탈을 쓰고 달려온 시간들이 벅찼던 걸까. 비좁은 가능성에 집착하며 달려온 시간도 이젠 벅찬걸까. 간신히 감정을 눌러내고, 넘치려는 눈물을 주머니에 꾸겨넣고, 방전된 기분을 주워메고.
아무렇지 않은듯 다시 사무실로 올라간다.
-Cheol
온점이 몇 개나 붙었는지, ㅋ인지 ㅎ인지. 적절한 이모티콘을 사용했는지. 메신저로 연락을 할 때는 신경 써야 할 부분이많아진다. 그간 이 미묘한 뉘앙스의 조합이 흐트러져 생긴 오해들이 꽤 있었다. 싱거운 장난이 싸움이 될 때도 있었고 작은 실수가 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몇 년을 혼자 지내면서 쌓인 습관 때문에 지영을 서운하게 만드는 부분이있다면 고칠 테니 그때까지 잠시 인내를 해달라는 말이 관계를 생각해볼 시간을 갖자는 말로 전해지기도 했다. 아찔한 일이다. 서로 다르게 이해를 하고 각자 급발진을 해버리고.
‘자, 그럼 그 말을 꺼내볼까. 그러면 덜미를 잡히는 꼴이 되려나. 역시 그런 말은 아직 입 밖에 꺼낼 시기가 아니야.‘
설왕설래가 손에 땀 쥐며 머리를 굴리게 만드는 전략 게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애인을 설득시키거나 할 말이 없도록만들면 나의 승리가 된다. 그런 전투가 몇 번이나 반복되고 나서는 애인이 저도 모르게 내 말을 수긍하게 되거나 말싸움을할 때 져주는 일이 결국 나의 승리가 된다는 것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전투를 꾸준히 이겨나가도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때때로 둘 중 하나는 일부러 전투가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누굴 사귀고 있는 중인지, 애를 하나 키우는 것인지. 왜 감정을 이런 일로 소모하고 시간을 날려야 하는지. 현타가 왔다. 사소한 다툼이 쌓여 튼튼한 관계의 지반이 되리라는 믿음이 흔들린다. 애인과 같이 있는 시간이 나의 하루를 망치고나를 괴롭게 한다는 생각이 들 때, 날씨가 좋아 같이 캠핑을 가서도 각자의 시간을 그곳에 없는 다른 사람들과 메신저를하며 보내고 있을 때. 나는 연애를 혼자서 견뎌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간직하는 방법을 잃는 중이다.
내가 나를 다 잃어버리기 전에 우리가 더 싸울 일 없는 완숙한 연인이 되거나, 어쩌면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마음의 코어가 드러날 때까지 싸우다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거나. 어느 쪽으로도 기대는 없고 단지 마음이 다시 평온해지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을 갖는다.
-Ho
2020년 9월 27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