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분위기"

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오십 세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아마도 그날은

지금같은 가을 어스름.


조금 복작거리는 오픈 된

가게에서

당신과 내가 좋아했던

음식을 시켰고,


새삼스럽게 어제의 일을 이야기하고,

또 당연하지 않게 되어버린

내일은 이야기할 수 없었어.


해가 맑게 떠 있던 날

당신이 아껴둔 새 옷을 꺼내

입었다는 날,


그런 날에 이별이었다.


우리는 이별을 알았고

약속했고,

마지막을 알았다.


끝을 바라볼 때에

날이 너무 따스해서,

낮이 너무 평온해서

슬펐다.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그 날의 분위기를,

그 때의 감정을,

그 순간의 당신을.



-Ram


1.

입김이 호호 나오는 날에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짧은 치마에 기모도 아닌 얇디얇은 스타킹 하나 겨우 신고

그래도 배는 시렵다고 끈나시 덧대입고

그 위엔 (치마 속에 넣어 입기 위해 절대 두껍지 않은) 목티를 입고

울 몇 프로가 섞였는지도 잘 모르겠는 자켓 입고

이제는 하도 신어서 아픈 줄도 모르는 높은 힐을 신고

깔깔거리면서 누굴 만나는 지도 모르는 채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겨울이 있었다.


2.

밤 9시 정도였으려나.

홍대역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왔는데 눈과 비가 섞여서 내리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우산을 폈고 약속장소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 우산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놀라서 옆을 보니 어떤 남자애였다.

죄송하다며 능청스럽게 우산이 없다고 떠들던 남자애는

나보고 자기 약속장소를 말하며 거기까지만 데려다달라고 했다.

우산이 없다면서.

걔가 말했던 약속장소는 내가 가는 길이긴 해서

내 약속시간에 늦지 않게 일단 걷자고 말하며 우산을 같이 쓰고 걸었다.

정말 5~7분도 안되는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몇 마디를 나눴는데

알고보니 걘 나랑 동갑이였고, 자기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했었다.

걷다보니 걔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잘가라고 인사해줬다.

그러자 걔가 나중에 고맙다고 커피를 산다며 번호를 물어봤다.

근데 웃긴게, 내가 전혀 호감있던 모습은 아니여서 그랬는지,

(하얗고 마른 남자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리고 동갑이라서 뭔가 대학동기느낌이 있어서 그랬는진 몰라도

진짜 친구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별 생각없이 번호를 알려주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 이후 걘 나랑 정말 따로 만나서 커피를 샀고 몇 년 가진 못했지만 정말 친구가 되었었다.

걘 지금은 결혼을 한 것 같다. (어느날 본 메신저 프사가 신부랑 찍은 결혼사진이였다)


3.

난 너에게 너무 생각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한다고 말했고,

또 그런 네 모습에 너무 답답했었는데.

그런 모습을 짧지 않게 보다보니 어느새 내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더라고.

예전 같으면 그냥 별 생각 없이 했었던 일들도

괜히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어버렸더라고.

근데 이젠 조금은 다시 내려놓으려고해.

나는 너처럼 그렇게 답답하게 살지 않을꺼야.



-Hee


그 뜨거웠던 열기에 익숙해질 때 쯤

나도 모르게 여름을 소홀히 대할 때 쯤


비가 온 어느 다음날

여름은 불쑥 떠나버렸고,

불쑥 떠나버린 여름의 빈자리를

서늘한 가을바람이 메워온다.


하루 아침에

계절이 바뀌어 버리듯

내 마음의 온도도 바뀌어 뒤집히고


혼란스런 맘을 부여잡고자

중심을 잡아보고자


아둥바둥 안쓰러웠던

그런 하루



-Cheol


1.

더운 날씨가 갑작스레 선선해지니 반갑다가도 이내 시큰한 추위가 들이닥칠 것을 예감한다. 자고 일어났더니 침 한 번 삼키기가 어려울 정도로 편도가 부어올라 있었다. 저녁에 환기한다고 열어둔 창문을 닫지 않고 잠들어 밤사이 추위에 웅크리며 잠을 설친 아침이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도 찬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고 쓸데없이 느긋했던 샤워 덕에 출근이 늦어 서둘러야만 했던 아침. 하늘은 어제처럼 맑고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길을 걷는다. 강원도 깊은 산속 기온은 이미 영하로 떨어졌다던가, 얼음이 얼었다던가. 문득 계절 따라 변하는 당연한 사실들에 괜한 싫증이 났다. 전처럼 긴 소매 옷을 꺼내 입으며 팔에 느껴지는 부들부들한 감촉에 설레지 않는다. 집을 나선 지 이제 겨우 삼십 분. 하루 사이 많은 게 변한 것 같았고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지독하게 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2.

빽빽하게 밀리는 퇴근길 차량 정체의 앞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늘 궁금했는데 오늘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비상등을 켠 내 차 뒤로 길게 죽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을 보다가 눈앞이 깜깜해지며 현기증이 났다.


아저씨, 무슨 운전을 그렇게 험하게 합니까. 일단 보험사부터 얼른 부르시죠.


지독하게 긴 하루가 어떻게든 마무리되려는가 싶을 찰나 기어코 사고가 생겼다. 가벼운 접촉사고였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현타가 세게 온다. 다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미니멀리스트랍시고 물건을 내버리더니 결국 스님들이 입을 법한 옷을 몇 벌 돌려 입으며 해탈한 듯 지내는 수현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 마음을 나는 참 쉽게도 비웃었었는데. 화를 지우기 위해 명상을 한다고 말하며 웃는 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아직 가로수의 나뭇잎이 떨어지기도 전인데 제법 을씨년스럽고 서글픈 하루다.



-Ho


2020년 10월 11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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