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쉰 일곱 번째 주제
네게 묻지 않았던 사실들.
구태여 묻지 않아도
늘 알고 있었다.
사랑이라던가
운명이라던가
그런 대단한 감정이 아니어도
너를 욕심내고 있는 내 자신이
충분해서 묻지 않았다.
하지만
조바심이 날 줄 몰랐다.
확신이 필요할 줄 몰랐다.
네게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만
기억되면 될 줄 알았다.
말 하지 않아도
알아줄 줄 알았거든,
그렇게 네게 확신이
사라져가는 줄 모르고.
그렇게 너에게서
내가 점점 지워지는 줄도 모르고.
-Ram
꼭 필요한 것들도 사지 못하게 했던 한 줌의 걱정
이제는 이름도 까마득한 내 첫 에프바이 페라가모 향수
수다도 떨고, 계획도 세우고, 팔찌도 만들던 우리 동네 카페
늘 현명한 선택만 할 것만 같았던 어떤 삶
단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밤
속도를 더 줄일까 말까 고민했던 페달 밟던 순간들
찬 바람이 불 때쯤 동네에 사는 친구와 만나 함께 붕어빵을 먹던 순간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욱 관심이 없었던 희대의 라볶이 레시피
제일 깡말랐었을 시절에 신나게 주문했던 밀크팥빙수
홍대에서 이젠 먹을 수 없게 된 히비의 앙카케
가을에 연차를 내서라도 꼭 가야했던 프로젝트 온더로드
고작 한 번이지만 진한 추억으로 남은 나의 작은 카페
특히 돈 앞에서 크게 들렸던 머리 굴리는 소리
막간을 이용한 테라스 영어교실
언제라도 네겐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과 오만
-Hee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었다.
누군가를 향한 우리의 마음.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분위기.
우리가 이루어 온 문화.
젊고 찬란한 우리의 모습.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하나 하나가 자연스레 주변의 일상과 함께 바뀌어간다. 날씨는 흐려지고 이전에 없던 전염병이 돌고 이에 사람들은 고립되고 빈부격차를 좁히지 못하는 사회구조 속 출생아 수는 줄어들고 사람들 간 박탈감은 늘어난다. 애써 싹 틔웠던 동료애는 사라지고 우리들 마음속 순수함도 사라지고 기계적 일상들은 늘어난다.
사회 여기저기서 퍼져나오는 현상들에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었다.
서로를 향한 배려.
누군가를 향한 인정.
우리 마음 속 본연의 순수함.
그리고 우리의 기억과 추억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Cheol
잘 지내지?
그럼 잘 지내지. 요즘은 멀리서도 인스타로 네 소식 다 듣고 봐. 좋아 보이더라.
나는 그저 조용히 눈웃음을 지었다.
열심히 차린 식사를 먹지 않는 자식에게 빡쳤다던 일상도 스스럼없이 sns에 올리는 친구라 좋은 순간만 크롭 해서 올리는 작위적인 내 인스타그램 사정은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원체 연락을 잘 하지 않는 친구에게 할 수 있는 몇없는 선택지의 빈말이었을 수도 있고. 그날 결혼식장에서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잘 지내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고 어느순간부터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깊이 믿는 사람처럼 너도 좋아 보인다는 말을 꾸준히 되풀이했다.
나는 잠시라도 잘 지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내게 일어난 여러 일들과는 관계없이 남들 보기에는 잘 지내는 사람이 되고 나니 어떤 수치심이 밀려왔다. 붙잡을 새도 없이 내 안에서 흩어져 사라져버린 것들을 두고 붙잡아 뭐 하겠냐며 쿨한 척 스스로 되뇌었고 잘 지낸다는 말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구석으로 도망 쳐버린 비겁자가 된 것 같았다.
사라진 것들과 아직 남은 것들.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도, 얼마큼 괴로워야 할지도 모르지만 끝내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그럼에도 여태 잘 살아왔지 않느냐며 용기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언젠가 내가 진정 괜찮아진것 같다는 생각을 할 날이 오기는 할지, 그게 마냥 두렵기만 한 초겨울 저녁, 다시 ( )을 깊이 생각한다.
-Ho
2020년 11월 8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