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

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일흔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적당한 날의 주말.


약속이 없는 오후를 고른 듯

날씨도 애매한 경계를 타고

변덕을 부릴 때.


미뤄둔 빨래,

곳곳에 쌓인 청소거리

같은 것들을 꾸역꾸역

끄집어 내어 정돈한다.


누군가 내게

당신의 30대는 어떠했느냐

묻는다면,


가장 괴롭고 공허했으며

위태롭지만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때였다고.


그렇게 얘기해야지.


무엇을 잡아야 할 지 몰라서

일단 쥐어보고

흐뜨러트리길 여러번,


그렇게 넘어질 듯

넘어지지는 못하는

순간들을 견디며

나아가는 며칠, 몇 해.


그런 주말.



-Ram


1.

뭐라도 채워야 흡족해지는 마음.

아주 가끔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도 해야 놓이는 마음도 있다.


2.

자꾸 돌이켜보다가도 창창한 앞날들이 모두 돌이켜보는데 쓰여버려서

정작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마음에

다시 책상을 정리해보고. 다이어리를 끄적여보고. 모아둔 스티커를 잔뜩 붙여도보고.


3.

그동안, 그만큼 공허했으면 됐지!

다시 채워나가면 되지 뭐!


4.

아주 작은 상처일지라도

어딘가 아프고 나면 간절히 느끼는 일상의 소중함.

결국 돌이켜보면 대부분 엄살이였던 것일수도 있겠다.



-Hee


네가 빈 그 자리에 순식간에 가득 들어찼던 그 공허감이 싫었어. 팡 팡 펀치를 날리고 단 하나의 펀치노트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 펀치를 날릴수록 그 공허감이 흩어지는 것만 같아 온몸이 땀범벅이 될 때까지 펀치를 날렸지 뭐야.


어쩌면 공허감은 비어있는게 아닌 무엇인가 안좋은 감정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게 아닐까 싶었어.


매일 매일 공기처럼 가득찬 그 공허감을 향해 펀치를 날려. 단 하나의 펀치노트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말야. 펀치를 날릴수록 그 공허감이 흩어지는 것만 같아 온몸이 땀범벅이 될 때까지 펀치를 날렸지 뭐야. 그리고는 또 집중할 게 필요해서 내 작업물에 들러붙어 지냈지 뭐야.


이렇게 물장구치듯 하루하루를 채우지 않으면 그 공허에 잠겨 침몰하듯 가라앉아 버릴까봐 말야. 괜히 뒤돌아보았다간 그 공허에 잠겨 침몰하듯 주저앉아 버릴까봐 말야.



-Cheol


몇 주 째 연이어 불어오는 태풍에 사과밭의 토사가 무너져 나무들이 죄 뿌리 뽑힌 채 흩어졌다. 대부분 소실됐고 열 그루 정도는 바로 아래 과수원의 펜스를 무너뜨리고 이리저리 엉킨 채 무참히 누워있었다. 몇 번의 겨울을 보란 듯 이겨내며 튼튼하게 자라나더니 올해 드디어 내 키 보다도 높게 자랐건만. 영양분을 빼앗기지 말라고 뙤약볕에 잡초를 뿌리뽑은 게 어제였건만. 어떻게라도 손을 써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무너진 펜스를 보상하고 땅을 다시 다지고 유실된 나무들을 찾고 새로 유목을 사와 심고 키우기까지, 산더미같이 쌓인 일은 어떡하고 복구를 위해 써야 할 돈은 또 어떻게 마련할지. 농사를 망쳐 올해는 한 푼도 벌 수 없게 됐다는 말을 집에 전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밭에서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어디로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 안에는 온통 이 사과밭과 나무만 있는데 사과밭 어디에도 나는 없다. 내 존재에 대한 어떠한 필요도 느낄 수가 없다.



-Ho


2021년 2월 7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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