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여든 한 번째 주제
17년 7월 초입에 들어왔던 회사.
약 4년의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월급은 조금씩 올랐다
그리고 꿈꾸던 희망이나
일없이 웃던 즐거움들도
조금씩 깎였다.
예전처럼 치킨 한마리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먹고 싶은 과일은 철마다
사먹을 수 있다.
집은 전보다 넓어졌고
필요한건 어느때나 살 수 있다.
그런데도 공허했다.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는 것들이 생긴다.
퇴근 후 떠들던 친구도,
주말을 부지런떨게하던 애인도,
사라지고 나면
일 속에서만 끈을 찾는다.
핑곗거리.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수도 없다.
그래도 그만둔다는
꿈을 꾸곤 한다.
삶을 부수고 나야 보이는 것들을
아직도 잡을 용기가 없으니까.
-Ram
1.
다행인지 불행인지 심보 참 고약하다. 그렇게 좋아해달라고 사람을 끌 땐 언제고, 막상 좋아해버리면 도망간다. 도망간 주제에 별안간 그 마음이 그리워져서 다시 좋아해달라고 한다. 잊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레퍼토리. 이제는 그만두자.
마음껏 그리워하는 건 괜찮다 싶다가도 죽어도 약자가 되긴 싫은가봐. 혼자서만 그리워하고 있는 현실이 초라한가봐. 진한 이별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데, 자존심은 하늘 끝까지 솟아있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한다.
2.
무엇이든 나의 멈춤을 아쉬워하는 친구가 있다. 반대로 나의 시작은 항상 응원해준다. 앞으로도 나의 많은 시작들은 기본적으로 응원이 깔려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마음이 든든.
3.
12년 전 춘천에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염리동으로 이사온 적이 있는데, 며칠 전 일하다가 우연히 그쪽 지도를 볼 일이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내가 잠시 살았던 염리동 집은 물론이고 그 주변이 재개발돼서 올해 새로운 아파트 입주가 시작된 것이다. 아. 이젠 다시 와이파이를 찾아 헤매던 계단도, 와이파이를 빌미로 먹던 빵도, 처음 오이와 당근이 소주와 잘 어울린다고 느꼈던 가본 실내 포장마차도, 퇴근 후 혼자 우동을 시켜먹었던 분식집도, 쌀쌀한 날 그린티 라떼를 주문했던 카페도 모두 사라졌다. 다시 한국에 가서 이대역 5번 출구를 찾아 나간다 하더라도 그 자리엔 그 모든 곳들이 없다. 정말 완벽한 상전벽해다.
-Hee
해야 할 말은 해야한다고 생각했었어. 스스로 말을 내뱉었다면 아무리 장난처럼 내뱉은 말이어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었지 뭐야. 이번달에 꼭 퇴사할거라면서 나에게 cheol님은 언제 퇴사할거냐고 묻는 그 물음에 '두 분 퇴사하면 뭐 저도 한두달 뒤 11월 쯤 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던 그 말은 결국 현실이 되었어.
"그만두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담긴 의미가 참 많았지. 퇴사 후에도 잘되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냥 그 회사에 남아있을걸 그랬나 싶기도 한데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남에게 넘진 채 살아가고 싶진 않았던 것 같아. 그렇게 미련없이 퇴사하고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휴식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지만 마음속에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말을 언제든 내뱉을 준비를 해두자. 그래 더 부지런하게 준비하자.
나 답게 살기 위해서 말야.
-Cheol
혼인신고를 하고 재산을 합쳐 집과 차를 사고, 일 년을 넘게 같이 살았지만 결혼식은 아직 올리지 않았다. 다음달 결혼식을 앞두고 청첩장은 이미 돌렸다. 결혼한다는 말을 꺼내기도 조금 어려워진 관계의 지인에게까지도 민망함을 무릅쓰고 소식을 전했고, 그러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뿐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수많은 축하와 축복의 말보다 진정으로 결혼이 좋아서 하는 게 맞냐는 물음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 전 장인어른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자네가 정말로 내 딸을 평생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을 좀 해보게.
다툰 뒤 친정으로 가버린 아내를 데리러 갔다가 장인어른과 술을 들이켜게 됐는데 그 자리에서 질책이 아닌 사과를 받아 얼떨떨한 참이었다. 이 결혼을 지금 와서 물릴 수 있는 것인가. 이혼이라는 글자가 평생 따라다니는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확신에 가득 찬 마음은 채 일 년이 다 되기도 전에 무뎌졌다. 너무 성급했었다는 후회가 문틈으로 들이치는 빗물처럼 서서히 번져왔다. 진심으로 좋아서 한 일이라고 앞으로도 마냥 똑같이 좋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나도 분명 모르지 않았을 텐데.
결혼이 좋아서 하냐는 물음에 후회할 것 같기는 하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말은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삼켜진다. 내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지, 안 맞아도 잘 맞춰 살아가는 게 결혼이지. 솔직히는 결혼을 물릴 용기가 나질 않아서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게 또 결혼인지도 모르지.
-Ho
2021년 4월 25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