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러미"

도란도란 프로젝트 - 사백 여든 한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딱 그런 거였다.

잡아 떼면 그만이었던 일을

여기까지 잘도 끌고 왔다.


당신을 만났던 순간이

거짓말처럼

한 순간 폭 하고 가라앉았다.


손톱 끝, 옆,

가장 쉽고 연약하고

아무렇지 않은 공간에

몰래 두었던 사람.


떠나가는지도 모르고 붙잡았던 끝.


거스러미를 발견할 때엔

이미 늦은 것이다.


어떻게 잘라내도

며칠을 신경써야 한다.


떼지 못한채로도 괴롭고

뗄 생각에도 괴롭다.


애써 잘 잘라내어도

그것대로

살점이 잘린 것 마냥 아리다.


그렇게 내 것이었지만

내 것이 아니었던

그런 것을 떼어야 한다.


그래야 새 살이 돋거든,

그래야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손을 보여줄 수 있거든.


네가 떨어져 나간 것인지

내가 떼어낸 것인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지만 말야.



-Ram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엔 자꾸만 거슬려서 신경 쓰이고.

그냥 쿨하게 다 없애버리고 싶은데 그러기엔 상처나 아픔 등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그런 거스러미 같은 존재처럼 지낸 날들이 내겐 트라우마가 되었다. 깔끔한 손가락에서 잊은듯하면 종종 나타나는 거스러미처럼 나도 또다시 그런 나날들을 무방비하게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뒷통수가 싸했다.



-Hee


우드 카빙을 할 때는 대개 함수율이 높은 그린우드를 사용하기 마련이다. 단단한 건조목을 다듬을 때는 칼날이 잘 들지 않는 데다가 손이 아파 작업 속도가 느려지고, 힘을 과하게 주다가 다칠 위험도 높아지기 때문이다.(나뭇결을 살려서 작업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우드 카빙은 부드러운 그린우드를 수저, 컵 등의 형상으로 깎고 사포질로 매끄럽게 다듬은 뒤 오일을 바르고 한참 건조시키는 단순한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에서 나무의 결이 뒤틀리며 거스러미가 올라오고, 뒤틀리다 못해 쪼개져버리기도 한다. 쪼개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를 다시 사포질로 다듬고 오일을 바르고, 이런 과정을 두세 번 정도 더 거쳤을 때 겨우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장갑을 낀 채 쓸었을 때 한 올의 걸림도 없이 미끄러질 만큼 매끄러워져야만 입에도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든 결과물을 누군가에게 함부로 선물해 준 적은 없었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정도로 다듬어서 직접 사용을 하고있는 물건들도 이따금 물에 닿아 수분을 머금은 뒤 거스러미가 올라왔고, 그럴 때마다 이 효율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취미를 때려치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껏 시간 들여 만들어봤자 어디에서나 다 팔고 있는 공산품보다 품질이 못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면 할수록 마음이 불편하기만 해서 결국은 쿡사 컵 하나, 수저세트 하나만 남기고 카빙을 그만뒀고 애써모은 수공구를 다 팔아버렸다.(한국에서 카빙에 쓸 만큼 크고 상태가 괜찮은 그린우드를 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 자주 사용하다 보면 자잘한 거스러미 정도는 마모되어 다시 부드럽게 변한다는 것도 모르고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Ho


1

손발톱 뒤의 살 껍질이나 나무의 결 따위가 얇게 터져 일어난 부분.

2

기계의 부품을 자르거나 깎은 뒤에 제품에 아직 그대로 붙어 남아 있는 쇳밥.


1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를 의미하는 소리였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공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가 널부러져 있는 공방은, 영락없는 예술가의 장소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의 손은 거스러미 때문에 고생이었고, 엉망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자신을 위해, 유일한 혈육인 자신을 위해 아버지는 일하셨다.

아버지와 거스러미가 진 아버지의 손은, 그가 영원히 잊지 못할 어린날의 기억들 이었다.


2

검사의 검은 영혼을 배었다.

검은 검사의 영혼이었다.

검은 단순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검사의 힘을 버티기 위해, 몇번이고 내리쳐졌다.

검사의 얼을 버티기 위해, 몇번이고 달구어졌다.

검사의 혼을 버티기 위해, 몇번이고 담금질했다.

마지막으로 모양을 잡고, 날을 세우고, 거스러미를 다듬어야 검은 완성되었다.

오직 검사를 위해.

검사의 길고 긴 여정을 위해.

검사의 명예와 승리를 위해.

검은 만들어졌고, 또 버텼다.



-Om


2023년 3월 26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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