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사백 아흔 한 번째 주제
역시나 였다.
나는 그런사람이다.
나는 지독한 사랑과 애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위인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나의 영역을
조금이리도 침범할라 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큰소리로
떠나보내고 만다.
그게 애정이던 관심이던
어떤것이라도
참고 견디질 못해서,
그렇게 전부 떠나보내고야 만다.
나는 그렇게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사랑인지 애정인지
그런 것도 잘 모르고
역시나.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법 밖에
모르는 고질병을
이번에도 저지르고야 말았다.
-Ram
바람과 소망들이 응집해버리면 커다란 이상이 되고, 시름시름 앓던 병처럼 꿈만 꿔오던 이상이 현실과 맞닿아 버리는 지점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마치 블랙홀 옆을 지난 것처럼 시공간이 모두 뒤바뀐다.
-Hee
서너 달, 한참 크로스핏을 재밌게 하다가 박스에 안 나간 지 3주가 지났다. 한차례 앓으며 운동을 멈춘 게 가장 큰 이유였고, 같이 운동하던 후배가 흥미를 잃어 나 혼자서 다니게 됐다는 점이 그다음 이유였다. 그때부터 매일 퇴근하고 나면 운동을 가지 않을 이유를 찾는다. 오늘은 새벽부터 출근해서 잠이 너무 부족해. 내일부터 여행을 가야 하는데 괜한 근육통을 몸에 단 채 가고 싶진 않아. 없던 저녁 약속을 굳이 만들고 다음 주부터는 꼭 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담배를 끊으려던 때 했었던 그 가볍고도 허무한 다짐.
끈기가 부족한 점은 내 오래된 고질병이다. 별 수 없이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을 잘 버텨내는 것과는 틀림없이 다른 부분이다. 매일 하는 운동이 습관처럼 자리 잡아서 이제는 운동을 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몸이 더 무기력해지는 단계까지 겨우겨우 다시 체력을 끌어올려 놓고도 이다지 쉽게 포기해버리려 하다니. 오늘 이 피상적인 자기 비하를 끝낸 다음에, 그러니까 다음 주에 나는 다시 운동을 시작할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후회로부터 시작된 생각이 단지 비하로만 끝나버리면 정말 어디에도 쓸모없는 질병에 걸린 것을 완전히 인정해야만 할 테니까. 병을 떨쳐내기 위해 다시 체력을 키울 차례다.
-Ho
곳곳에서 조금씩 병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도, 지구도.
꽃이 이르게 피고, 날씨가 더워지고, 동물들이 죽는다.
생명은 축복이라 생각했는데, 지구도 그렇게 생각할까?
가끔 인간이 재앙이라는 생각이 든다.
텀블러를 쓰고, 용기를 들고 가서 음식을 포장하고, 고기를 덜 먹고 이런 것들을 하면서도 의미가 있나 생각한다.
하지만 고질병이 아니라 노력하면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 노력해 봐야지.
나의 기쁨을 위해 그 어느 것도 희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누리는 것들이 누군가의 희생이라 생각하면 조금 내려놓게 된다.
어젯밤에 주문한 물건이 오늘 아침에 내 문 앞에 와있다는 것은, 누군가 밤새 그 일을 했다는 것.
편리하고 빠른것이 가끔은 마음을 더 답답하게 한다.
더 빨리, 더 멀리 가려고 하지만 정작 자기 마음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모른다.
모든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아프지 않고, 평온하기를.
서로에게 사랑을 나눠주기를.
-인이
2023년 6월 4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