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

도란도란 프로젝트 - 오백 네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언젠가 그런 기억이 났다.


난 원래 음료수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사실 네가 빨리 집에 가는 게 싫어서

그래서 자꾸만 자판기 앞을 서성이며

시간을 끌곤 했다.


밍기적 거리면서 다 마시지도 못한 음료수를 손에 들고

더울 때에나 추울 때에나

그런 순간들을 담아두고 싶어했다.


뭐가 먹고 싶냐는 네 물음에도

허둥대며 아무거나 골라도 된다는 바보같은 대답을 해도


늘 그 중에 제일인 것을 네가

감쪽같이 골라내는 걸 보면서

우리가 천생연분인줄만 알았지.


지금에야

커피도 아무 곳에서나 마시고

음료수도 마시고 싶은 만큼 잔뜩 살 수 있는

대충의 어른이 되긴 했지만,


그런 때의 순간들이 어떻게 지나온 지 모를 만큼

까마득해지기도 했다.


음료수를 고르던 나의 손도,

자판기 앞에 서성이던 날

모른척 반가워 해주던 너의 웃음도,


그런 모든 것들이 이제 오지 않는 것들이라

그래서 약간은 씁쓸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기분이 드나보다.



-Ram


1.

내가 자주 읽고 자연스럽게 손이 뻗게 되는 그런 책들 말고, 더 다양한 책을 읽고 싶다. 그래서 그냥 랜덤으로 책이 나오는 자판기가 집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 도형이든, 색깔이든, 여러 버튼이 구분되게 나열되어 있는데 돈을 넣고 그날 내가 끌리는 버튼을 누르면 어떤 책이 딸깍하고 떨어지는 거지. 그게 소설이 될 수도 있고, 문제집이 될 수도 있고, 에세이가 될 수도 있고, 두꺼운 역사책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책을 읽어도 되고, 누군가 필요할 것 같은 사람에게 선물을 해줄 수도 있고. 늘 그 자판기 앞에 서면 어떤 책이 나올까 설렐 것 같다.


2.

조만간 3년 만에 제대로 된 한국의 겨울을 느낄 것 같다. 작년 초에 잠시 한국에 왔었을 땐 이게 겨울인지 뭔지 싶기도 전에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기 바빴는데, 이젠 가을부터 차근차근 밟아서 겨울까지 가겠지. 늦가을쯤, 초겨울쯤 찬 바람이 불 때 학교 도서관에서 시험공부하다가 잠시 도서관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조지아 오리지널 캔커피 자주 마셨는데. 친구가 좋아했던 따뜻한 실론티도 생각나네. 올해는 편의점이나 자판기에서 조지아 오리지널 보이면 꼭 마셔야지. 그 맛이 그립다.



-Hee


마지막으로 자판기를 이용해 본 게 언제였는지 또렷하게 기억한다. 대마도에서 트레킹 하던 중에 발견했던 담배 자판기. 일본어를 모르니 아무거나 눌러서 뽑아 피웠다가 고농도 타르, 니코틴 한 모금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기억. 그때를 제하면 자판기를 이용해 본 게 도대체 언제인지 모르겠다. 단 음료를 싫어하니 자판기를 이용할 일이 없는데 내 몇 안 되는 좋은 점이라고 생각된다.(그런데도 동전들이 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입맛이 탄수화물도 좀 꺼려 해주면 좋으련만.



-Ho


돈을 넣으면 자판기는 우물우물 돈을 먹으며 내가 선택한 것을 내어준다.


내가 주문한 물건이 나에게 배달이 오듯,

내가 선택한 것을 자판기가 성실하게 그대로 내어주듯,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선택하면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뭘 원하느냐겠지.


사랑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나를 더 알아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 가지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들을 세상에 더 많이 말해야겠다.


내가 낸 용기와 내가 한 노력보다 더 많이 내어주는 세상은 엄마 같다.


지나가다가 자판기가 보인다면 음료수 하나 뽑아 마셔야지. 그리고 감사하다고 생각 해야지.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에.



-인이


2023년 9월 3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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