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오백 여섯 번째 주제
그곳에 가면
많은 것들이 녹아있다.
나의 풋내나는 사랑 비스무리한 것도,
얄팍했던 사춘기 시절도,
하늘과 땅을 번갈아 걷던
나의 공상도,
그런 것들이 녹아 붙어있다.
어른이 되면 으레
그런 것들을 잊는다.
잃었다고 해야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래서 한 번씩
도망쳐나온 그 곳에
발을 담그러 간다.
현실이 필요할 때에도,
지독하게 메마른 감성을 채울 때에도
어떻게든 그 촌스러운 기억의 끝을
잘라먹으러 간다.
내 손때가 묻었던 흙바닥은
이제 고무로 채워졌고,
하늘볕을 견디던 나무 벤치와 돌계단도
인공 잔디와 무해해보이는 의자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나는 좀
모자란 상태로 그곳에 간다.
그때의 내가 좀 넘쳐나는 사람이었나보다.
이곳 저곳에 나를 남겨두고도,
몰랐거든.
그곳에 가면
그래서 나의 창피함, 어리숙함, 풋풋함 그런것들이 묻어나와
아리송한 기분을 채울 수 있다.
나의 옛 집, 옛 학교 그런 곳들.
-Ram
난 기본적으로 장소와 음악을 추억과 결부시키는 재능(이랄 것까지야)이 있다. 내가 그 당시엔 이런 음악들을 들으면서 그곳에 있었지. 내가 그땐 저런 음악들을 들으면서 누구와 그곳에 있었지. 이런 시시콜콜한 추억들이라고 모두 말하기엔 조금 주춤스럽지만 그런 기억들이 모두 장소, 음악, 그리고 사람과 얽혀있다. 그래서 때론 특정 장소들과 음악들을 피할 때도 많았다. 물론 장소들과 음악들은 아무 잘못도 없지만. 내가 한데 엉클어 놓은 그런 것들이 나를 속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장소들, 음악들에게 내가 스스로 나만의 프레임들을 씌워둔 게지. 그래서 이젠 조금 놓아주고, 자유로워지려고. 그 프레임들을 벗겨내고 다시 새로운 눈으로, 마음으로 (비록 또 다른 프레임이 씌워질 게 분명하지만) 볼 것이고, 갈 것이고, 들을 것이다.
-Hee
나에게 여행은 언젠가 가서 살기 좋은 곳을 찾는 일에 가까웠다. 주말을 보낼 한적한 곳, 현생에서 도망쳐서 가고 싶은 곳, 아무런 통제 없이 나를 풀어둘 곳. 여행을 꽤나 다닌 뒤에서야 이게 별로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는 곳마다 좋았으니 말이다. 아니, 사실 집이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남다른 애정이 있었던 도시도 내가 가서 살게 되는 순간 떠나고 싶어졌으니, 언젠가 가서 살기 좋은 곳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달까. 그래도 점찍어둔 곳이 몇 군데쯤은 있었다. 그중에서도 통영을 가장 좋아한다. 그곳에는 섬이 있고, 고립이 있고, 여전히 살아있는 자연이 있고, 충무김밥이 있고, 갈 때마다 헐벗은 듯 편안했던 기억이 있다.
-Ho
이 주제를 받아 들고 여러 곳이 생각이 났다.
일단 나는 외국에 사니까, 한국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내가 사는 동네, 내 가족이 있는 곳, 내가 커왔던 곳.
그러다 든 생각은, 내가 죽어서 가게 될 곳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종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이 편해진다.
내 삶도, 모든 사람의 삶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 안심이 되게 한다.
삶이 힘들었을 때 오히려 더 죽음이 불안했는데,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게 되니
오히려 죽음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 나를 안심하게 하는 게 아이러니하다.
한정적으로 주어진 이 소중한 삶의 기회를 나는 어떻게 써야 할까.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조금씩 알아가는 나 자신과 함께 내 남은 인생을 잘 살아내고 싶다.
죽는 순간을 생각하면 심각한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성과를 채근하는 상사를 봐도, 내가 죽을 때 저 사람이 생각이 날까? 하는 물음을 하게 되고, 그녀가 주는 부정적 감정을 나에게 가져오지 않게 된다.
반면, 내가 죽을 때도 생각날 사람들에게는 더 소중히 대하게 된다.
그곳에 가면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걸까?
우선 지금 현재를 잘 살아내보자!
-인이
2023년 9월 17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