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육백 여섯 번째 주제
조용히 지나가는 올해의 여름.
어느 때엔
엉덩이 붙일 겨를 없이
여기저기 다녔던 것 같다.
좋다는 곳은 가보고
맛있는 것 먹어보고
그런거.
SNS에 휴가 사진을 올리며
신나던 때도
먼 얘기 같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게 없어지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는
올해의 여름.
나는 지독한 우울속으로
던져지길 선택했다.
뜨겁고 지글거리는 여름 속에서
딱 내가 가진 자유만큼
그렇게 조용히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숨막히고 뻣뻣한
여름의 어떤 날들을 말이다.
부디 탈 없이 지나가길,
나는 좀 더 어른스럽게 지낸 거였길.
-Ram
이번 여행에선 산에 가고 싶어서 등산화를 챙겼고, 이른 새벽에 러닝하려고 러닝화를 챙겼다. 그리고 평소에 마구 걷고 싶어서 슬리퍼나 샌들 대신 운동화를 챙겼다. 구마모토 도착 첫 날, 산 입구에서 등산화로 갈아 신고 산에 올랐다. 활화산이라서 까맣게 변한 요상한 흙을 계속 밟을까 싶었는데 내가 일본에 도착하기 전날까지 왔던 기록적인 폭우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작고 큰 돌들이 길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어서 다시 한번 내 발목을 지켜주는 등산화의 소중함을 알았다. 그리고 과음으로 인해 다음날 생각보다 늦게 일어나버려서 러닝은 못할까 싶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는 날 새벽에 눈이 번쩍 떠져서 주섬주섬 러닝화를 신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른 아침이라 한적한 골목길을 뛰어다녔고, 도로 중간에 트램이 다니는 철로를 지나 공원 근처에 돌길도 뛰었다. 딱히 뛸 곳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던 찰나 저 멀리에서 뛰어오는 또 다른 러너를 보고 로컬 사람들도 이 곳을 뛰긴 하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러너가 반갑게 '오하요-'라며 인사를 했다. 나 역시 '오하요!!'라고 큰 소리로 인사하자 힘이 더 나서 신나게 뛰었다. 뛰다가 어떤 공원 근처 주변을 돌았는데 눈 앞에 엄청난 수와 꽤나 가파른 경사의 돌계단이 나타났다. 돌계단 꼭대기가 궁금해서 열심히 오르고 있는데 위에서 내려오던 노부부가 '오하요 고자이마스'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줬다. 왠지 모를 휴머니즘을 마구 느끼며 나도 반갑게 인사했고, 거의 다 뛰었을 무렵 골목길에서 어떤 산책 중인 할머니를 만났는데, 멀리서부터 보셨다며 '각꼬이데스'라고 말해주셔서 또 기분이 좋았고 신이 났다. 한국 가는 날이라서 조금 더 잠을 잘까 싶은 마음이 1초는 있었는데 역시 가져온 러닝화는 신어줘야 하고, 새벽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게 아침 에너지를 오늘 저녁까지 가져왔다. 좋은 에너지는 날 더욱 건강하게 해준다. 다음 여행때도 러닝화를 꼭 챙겨야지. 그리고 산이 있다면 등산화도!
-Hee
1.
수영을 취미로 하면 좋은 점 중 하나는 물놀이에 대한 갈망이 상시 해소된다는 점이다. 여름 하면 늘 시원한 계곡과 바닷가를 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예전과는 조금 다른 휴가를 계획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달까. 올해는 평창, 태백같이 비교적 시원하고 조용한 지역에서 유유자적 책을 읽고 달리기를 하고 음식을 해 먹으며 시간이 흐르는 대로 마음껏 낭비하는 시골 휴가를 내심 계획하고 있었는데 결론적으로는 또다시 바닷가를 가게 됐다. 암 튜브로 물 공포증을 조금씩 극복해 내고 있는 지영이 또다시 물놀이로 하루를 가득 채우는 촉촉한 휴가를 보내고 싶은 모양이다. 휴가 지역도 먹을 음식도 할 일도 모두 임산부 말이 아무튼 우선인지라 소박했던 계획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2.
한 주 한 주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둘이서 보낼 수 있는 조용하고 평범한 주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독하리만치 집구석을 사랑하는 지영을 밖으로 나돌게 한다. 초여름 발리 여행부터 강릉, 오사카에 이어 속초로, 벌써 네 번째 휴가를 다녀왔다. 한두 번 갈까 말까 했던 지난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기세다. 아마도 고작 네 번에서 그치지 않을 것 같다. 무자비한 물놀이, 식 폭행, 몸 무거운 임산부 케어, 짐싸기와 운전, 여행 후 뒷정리까지 모두 내 몫이지만 매 주말이 여행이었던 장거리 연애 때 생각이 나서 괜히 울컥했다. 그리고 뱃속의 아이가 만들어내는 변화가 적어도 내게는 전부 다 선물같이 느껴져서 두 번째 울컥했다. 아이에게 선물받은 여름휴가라니, 더 계획적이고 열정적으로 움직일 필요를 느낀다.
-Ho
나의 여름휴가는 남들보다 빨랐다.
이제 막 비가 쏟아지는 장마철, 연화도라는 섬에 가고 싶다는 이유로 시작됐다.
사실 혼자 여행가는 건 익숙했다.
남들과 여행하는 것도 물론 재밌었지만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느낄 수 있는 진가는 나에게 있어 누군가와 가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었기에 혼자가 좋았다.
배편을 처음 끊고 긴장된 채, 연화도행 배를 탔다.
날씨도 흐리고 바람도 찬 게 들어가 있을 법도 한데 갑판에 계속 서있었다. 바람을 피해 들어가는 것조차 그 시간이 아까워 나와있었다.
내가 도착한 연화도는 생각보다 작았고 생각보다 사는 사람이 없었다. 정말 작은 마을이 외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작은 학교 하나와 조용했던 절, 40분 정도 걸어야 나오는 출렁다리가 전부였다. 여느 관광지보단 좋아보이는 게 없지만 그럼에도 다시 가고싶다.
출렁다리를 못찾아 헤메느라 지나가는 분께 어디있는지 여쭤봤었는데 이 질문이 익숙한 듯 웃으며 저기로 가라고 알려주던 개를 산책시키는 아저씨.
다리가 붓겠다 싶을만큼 하도 걸어서 걸쳤던 남방을 벗고 반팔반바지로 다니니 걱정하듯 안춥냐 묻는 할머니 두 분.
그냥.. 그런 소박한 기억이 그 곳의 인상이 된다.
사람사는 냄새가 난달까.
화려하고 멋진 곳도 좋지만 가끔은 처음보는 사람한테도 보이는 따뜻함, 정 그런 것들이 더 생각나니까.
별 말이 아니어도 괜찮다.
-NOVA
2025년 8월 17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