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육백 열 다섯 번째 주제
우리집 거실에서
묘한 편백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프고나서
편백 반신욕기를 들였는데
거기서 내내 나무향이 난다
50이 넘도록 엄마는 비싼건
잘 안샀었는데
갑자기 거실에 엄마의 물건들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엄마의 안방에는 기타며 하모니카며
엄마의 취미생활로 이미 가득해서
거실까지 새어나오는
엄마의 물건들이 내심 웃기게 느껴진다.
오합지졸마냥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모여있는 우리집 거실.
엄마의 현재와 나의 과거
아빠의 모호한 지금.
우리는 치열하게 각자의
삶을 거실에 던져두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
나무향이 나는 거실에서 말이다.
-Ram
빙그르르 돌아가는 회전 책장, 소중한 친구가 뽑아준 내 얼굴보다 큰 패더스 맥그로우 인형, 캠핑 갈 때마다 데려가는 블루투스 스피커, 여름 내내 베란다에서 햇볕을 즐기다 다가오는 추위에 거실로 몽땅 옮겨온 우리의 식물들, 그리고 조금 전 보리차 끓이는 미션을 완료하고 커다란 전기장판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정우까지 있는 지금 우리 집 거실은 나의 행복 그 자체.
-Hee
거실 소파는 기적처럼 서로의 마음에 쏙 드는 게 일치해서 금방 사긴 했는데 지금은 (나에게만큼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호텔 라운지에나 두면 딱 맞을, 눕기에도 앉기에도 애매한 비정형의 소파. 물론 그 위에는 지영의 옷가지와 짐들이 한가득이다. 소파가 그런 상태이다 보니 소파 테이블 역시도 마찬가지로 잡동사니 거치대가 된지 오래다. 이 둘이 우리 집 깨진 유리창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잘 쓰지도 않는 가전과 짐들은 온통 거실로 모여든다. 말하자면 거실은 이 집에서 가장 넓은 오픈형 창고 혹은 쓰레기장과 다름없다.
지영이 육아휴직을 시작해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치우겠다고 말할 때는 뭐라도 변화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마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기대해 봤자 실망만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화장실과 주방에만 국한된 나만의 영역을 넓힐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아주 잠시간 품었다가 금방 좌초됐지만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다시 또 주말마다 부지런히 치워야겠다. 위생과 청소 문제로 싸우고 이혼의 문 턱까지 밟았다가 돌아온 뒤에는 어차피 치워도 실시간으로 더러워지는 집구석을 나도 굳이 애써서 치우고 청소하지는 않았는데,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내가 아니라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평생 가져본 적 없는 사명감이 불타오른다. 강박을 내려놓고 멘탈을 다잡아야 할 때다.
-Ho
어린 시절, 방보다도 더 내 방같고 집 가운데이자 중심이었던 거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매일 하던 루틴이 있었다.
미숫가루를 타고 티비보며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
미숫가루는 꼭 3잔 이상 탔고 꼭 우유에 타서 먹었다.
우유에 미숫가루를 다 풀지 않고 덩어리지게 만드는 게 맛있는 거라 생각했다.
우리집은 케이블이 안됐다. 볼 수 있는 건 kbs, sbs,mbc 그리고 ebs 뿐.
그 중에서도 ebs를 제일 좋아했다. 유치하긴 해도 하교 시간에 다른 채널은 재미없는 것만 주구장창 틀었는데 ebs는 그래도 볼거리가 풍부했으니.
그 나잇대에 비해 훨씬 많이 봤었다.
드라마며 예능이며 가리지 않고 다 봤다.
엄마는 항상 5-6시즈음 도착하신다.
그 시간까지 여러 채널을 돌려보며 미숫가루를 마시다보면 엄마가 오신다. 엄마가 오면 현관으로 달려간다.
혹시 뭐 사왔나 기대하며. 대부분 손에 뭘 들고 오진 않지만 부스럭 소리에도 기대를 잔뜩한다.
엄마가 도착하고나면 아빠를 기다린다.
아빠는 10시 가까이 되어야 도착하곤 했다.
어릴 땐, 거실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하루가 금방 지나가버린다.
-NOVA
2025년 10월 19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