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예순 두 번째 주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중간 즈음의 시간
집에 들어가기 싫은 겨울과
발걸음을 재촉하는 봄의
새초롬한 다툼의 기간
시샘 많은 겨울 바람은
따스한 손길이 미워
칼바람을 섞어 부는 기간
봄도 겨울도 아닌 그 중간즈음
아리송한 계절에도
노오란 수선화는 그새 피어났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 종소리 대신
스스로를 사랑해 마지않았던
나르시스의 흔적으로 봄을 먼저 맞았다.
아침엔 그 노란 봄냄새를 걷으며
파란 하늘 아래 햇살을 맞이하고
저녁엔 떠나기 아쉬운 겨울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인사하는 기간.
-Ram
1.
19년 만에 집에 있는 냉장고를 바꿨다.
집에 있는데 아빠가 와보라고 부르시길래 쪼르르 달려갔다.
“우리 냉장고 이걸로 바꿀꺼다!” 라고 하시면서 모니터를 내 쪽으로 향해 틀어주셨다.
“우와. 진짜? 우리 냉장고 바꿔?”
“응. 오래도 됐고, 옛날꺼라 전기세도 많이 들잖아. 예전에 컴프레셔도 고장나서 한번 고쳤고.”
아빠는 장바구니에 넣어둔 냉장고를 이제 구매하려고 ‘장바구니'를 클릭했다.
아무 생각없이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소리쳤다.
“어? 아빠 잠깐만!!”
“왜??”
“아빠 이거 뭐야?”
나는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네 개의 눈이 주목한 글귀는 바로 '초콜렛 20종 모음’.
“아.. 들켰네. 이제 곧 화이트데이잖아. 너네 사탕말고 초콜렛 좋아하니까 초콜렛 주문하려고 했지”
“와 아빠 진짜 짱이다!”
그랬다. 아빠는 우리들의 입맛과 행동을 모두 눈여겨보시고 특히 사탕보다는 초콜렛을 더 좋아하는 나와 동생을 위해 초콜렛을 몰래 장바구니에 넣어두셨던 것이였다.
며칠 뒤 여러가지 다양한 초콜렛들은 커다란 상자에 담겨 내 손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 초콜렛 중에 린도볼이 진정 최고다.
그리고 갸또쇼콜라도! 어쩜 이렇게 딱 알맞게 적당한 딱딱함에 진-한 초콜렛 맛을 느끼게 할 수 있지?
입 안이 행복한 환절기다.
2.
“어? 엄마랑 아빠랑 어디갔다왔어?”
늦은 저녁에 집에 도착한 나.
당연히 부모님이 계실 줄 알았는데, 가족 중에 내가 집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였다.
'띡띡띡띡’
깜깜한 거실에 불을 켜고, 외투를 벗고 있는데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아빠는 산책 겸 차를 놓고 전철을 타고 백화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제 환절기니까 얇은 바람막이 입으려고 하나 사왔어”
엄마는 해맑게 이야기하곤 쇼핑백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내게 자랑하셨다.
“오, 예쁘다! 잘샀네!”
슬쩍 한번 보고 힘차게 엄마에게 제스쳐를 취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엄마가 핸드백에서 주섬주섬 손바닥만한 종이를 꺼내며 내게 흔들었다.
“이게 뭐야?”
가까이가서 그 정체불명의 종이를 자세히 보니,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입구에서 쪽머리 곱게 한 직원언니가 나눠주는 향수 프로모션 시향지였다.
“아빠가 이거 너 향수랑 똑같은 냄새라고 하더라”
“오잉? 진짜? 나 아빠한테 한번도 내가 쓰는 향수 보여준 적 없는데?”
항상 나는 가방에 향수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화장대에서도 내 향수를 볼 기회가 잘 없다.
그때 아빠가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어머, 아빠 내 향수 알고 있었어?”
“어, 너꺼 당연히 뭔지 알지. 저거 종이 냄새 맡아보니 너꺼랑 똑같던데?”
정확히 말하면 완전 100% 같은 향은 아니지만 같은 회사에서 거의 비슷한 라인으로 나온 향수라서 향이 많이 비슷했다.
“오, 아빠 엄청 섬세하다”
“???”
아빠는 '얘, 뭐야..'라는 듯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셨다.
난 아빠가 내 향수를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 물론 당연히 외출하기 직전에 옷 다 입고 마지막으로 향수를 칙칙 뿌리니까 집을 돌아다니면 향이 날텐데
아빠는 그 향을 인지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 뭔가 내 향수같이 달콤하고 진하게 괜히 혼자 감동을 받았다.
-Hee
누군가 화난 표정으로 묻는다.
“친하다는 기준이 뭔데요?”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와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둘러댄 나의 대답은,
“시간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친해진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시간은 변명일 뿐이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너를 붙잡고 있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뾰로통한 채, 그 사람이 대답한다.
“친하고 말고는 시간이랑 상관없어요”
그렇다. 시간과는 상관이 없지. 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친해졌다고 생각할 때 그 것은 언제나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혼자여도 아무렇지도 않은 나 이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너가 흩어질까 두려웠다.
몇 번의 꽃이 피고 졌지만 봄은 아니었다.
너 역시 잠시 피었다 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에겐,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겨울에서 봄으로의 환절기를 함께 지나쳐 줄 우리의 시간이.
나의 봄은 너의 향기로부터 오기를 바라며.
-Cheol
1. 기다리고 기다리던 환절기가 돌아왔다. 어쩐지 이번 겨울은 눈도 오지 않고 춥지도 않은 듯 하더니 봄이 온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물러나길 싫어하는 눈치다. 어제 길을 걸으며 본 사람들은 긴 양말 대신에 매끈한 발목이 드러나는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오늘은 다시 도톰하고 목이 긴 색색의 양말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늘 그랬듯 봄 날씨는 제 멋대로니까, 금새 따뜻해질 테지.
2. 엄마의 전화에서 흘러드는 남쪽동네의 뚜렷한 봄기운이, 아직은 쌀쌀한 거리를 하릴없이 걷는 기분까지도 좋게 만든다. 올해 겨울도 무사히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스며든다. 오후에는 옷장에서 곱게 접어놓은 린넨셔츠를 꺼내 옷걸이에 걸었다. 목을 기분좋게 스치는 까칠함을 생각하니 이제서야 봄이 실감난다. 나는 그 까칠함을 좋아한다. 다가오는 계절을 준비하는 여유로운 기분을 좋아한다. 내리쬐는 햇살이 따가워지기 시작할 즈음엔 편의점 야외테이블에 올려진 맥주들을 보면서, 여름의 고약한 더위가 한풀 꺾여갈 무렵엔 하루 이틀만에 긴 소매 옷을 꺼내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늘어가는 겉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면서, 또 난로 앞에 모인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새그러운 귤을 까먹으면서 매번 그런 기분에 취하게 된다.
3. 맞이하는 계절들을 잘 나게 해주는 소소한 평화들을 언제까지고 좋아해야지.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감동보다도 이런 잔잔한 물결같은 평화들을 사랑해야지.
-Ho
2015년 3월 15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