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도란도란 프로젝트 - 일흔 세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보통 흔적이란 누군가 떠나간 자리에
잊을 새도 없이 피어나는 그 사람의 향기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더 짙은 향기를 남기지만
바람결에 나부끼는 민들레마냥
홀연히 떠나더라도
솜털같은 그 흔적으로 그 사람을 추억하곤 한다.


허나 떠나는 사람에게 뭍은
남은 사람의 흔적은
어떠한 마음으로도
채워지지 못할 흔적이다.


공기가 부서지도록 웃던 시간들과
코끝을 일렁이는 봄향기 가득한 찰나의 순간들
그토록 아름다웠던 시간을 접어
마음에 흔적으로 새기고야 만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하염없이 또 그대들을 추억합니다.
흔적을 남기고 가는 때에.



-Ram


1.
거짓으로 다이어리를 쓴 적이 있다. 많을지도 모른다.
절대 누가 읽을 수 없는 나만의 다이어리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몽땅 좋은 얘기만 쓴다.
그러다 문득 누가봐도 좋은 이야기들 이외의 다른 이야기들, 다른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내가 지금 무엇을 쓰고 있는 건지 깨닫게 된다.
그 후 항상 솔직하자는 생각을 하며 다이어리를 쓰다보니 조금 더 다양하고, 여러가지 내용들이 쓰여진다.
오늘도 조금만 더, 어제보다 더 솔직해져야지.


2.
A친구와 대화하면 정말 큰 굴곡없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시간들이 묻어나고,
B친구와 대화하면 그때는 철없이 좋지 않은 선택을 했고, 보통 생각하기에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들어가다
이제서야 다시 평범해져 그때의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회상하고,
C친구와 대화하면 어릴 적부터 다른 이들과 자신을 늘 비교하기에 알게모르게 피해의식이 심해져
종종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목소리에 많이 묻어나고.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많던 적던간에 자신이 들어왔던 것들, 보았던 것들, 경험했던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현재의, 순간의 ‘나'로 남아있다.
물론 평생 진행형이겠지만.
나의 흔적들은 지금 순간 어떤 모양새로 남아있을까.


3.
글, 사진, 목소리, 타인, 모습, 인상, 생각, 기억, 대화, 주제, 향기, 식습관, 공간 등 어떠한 형태로든지
나만의 흔적은 스스로 남기는 법. 조금 더 나답게 남겨졌으면 좋겠다.



-Hee


새빨간 상처가 났다. 마음속에 생긴 제법 큰 상처다.
상처는 고통스럽다. 상처가 난 부위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끝없이 흐른다.
나의 삶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치명적인 상처.
상처에서는 과거의 기억들이 선명히 새어나온다.
그리고 내 머리 속 생각들로 차오르기 시작한다.


풍선이 부풀어오르다 일정 수준을 지나면 터지듯이,
그대로 둔다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살기 위해 긴급히 응급처치를 해낸다.
글쓰기. 서둘러 내 머리 속에 차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쏟아낸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한 권의 책이 완성된다.


그리고 상처는 아물었다.
흔적은 선명히 남았지만 그 뿐이다.
나의 상처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도 생각들이 차오르지도 않는다.
미련도 없다. 단지 아련할 뿐이다.


누군가 말한다.
‘그 상처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저 생채기일 뿐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다.
내 몸에 선명히 나있는 상처자국을 구태여 가리고 싶지는 않다.


그저 흔적일 뿐이라고, 말해본다.



-Cheol


기다란 머리카락. 방 안에 희미한 비누냄새. 함께 얽힌 채 구겨진 바지와 팬티, 양말. 그의 흔적들. 늦은 오후, 내가 아끼는 반바지를 헐렁하게 입은 모습은 사뭇 아름답기도 하다. 너저분함 마저도 사랑할 수 밖에 없던 순간, 그의 흔적들을 차분히 개어놓는 나의 표정은 참 밝기도 했다.


그 사람의 흔적들은 그저 한 쪽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다고 치워지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부서지는 파도에 씻겨나가는 발자국 같은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 흔적들은 내게 또 다른 흔적들을 끊임없이 건네곤 했다. 말하자면 물리적 차원을 넘어 인간의 내면에 더해지는 형이상학적 흔적. 잊지 못할 커다란 상처나 벅찬 감동이 아니더라도, 그의 사소한 자취들은 충분히 깊은 흔적들을 내 속에 남겨 놓았다. 이렇게 남겨진 흔적들은 여태의 흔적들과 얽히고 설켜 곧 지금의 내가 된다.


어떤 흔적들의 뭉치는 불안하고 어둡다. 그러면서도 마주하는 이에게 가슴 설레는 흔적을 깊게 남기기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갖기도 한다. 이건 다른 환하고 싱그러운 흔적의 뭉치들은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볼 수 없는 나의 흔적들이 꼭 그 사람처럼 아름다운 흔적들을 건넬 수 있었으면. 고르고 골라낸 단어들과 밀도높은 흔적들을 주고받으며 누적되는 뭉치가 뿜어내는 온기는 얼만큼 좋을까.



-Ho


2015년 5월 31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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