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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Apr 18. 2019

언니, 아줌마, 그리고 선생님

       -아프지마오약국 보고서1. 호칭에 관한 고찰

언니

아줌마

저기요

사장님


약국에 와서 나를 부르는 호칭들입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열 받게 하는' 호칭들이죠. 시간이 흘러도 이런 호칭들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언니라는 호칭을 쓰는 여자들은 대개 외국인입니다. 살던 땅을 떠나 남의 나라에 와서 (혹 귀화하여 이제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고들은 예절이란 게 딱 그래서일 거라 짐작은 합니다. #나  언니 아니다 진심으로 이런 해시태그를 붙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호칭으로는 이모가 있지요. 


그런데 아줌마는 또 뭐란 말인가. 동네아줌마라고, 낮춰 부르고 싶은 속내를 드러내는 것만 같아 불편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는 상황을 분석해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 한번 분석해보자.  

 

우선, 약국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가운데 뭔가를 ‘판매’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됐습니다.  

약국 판매 제품에는 의약품만 있는 것은 아니죠.  흔히 의약품과 혼동하기도 하는 건강기능식품 말고도, 얼추 분류해보니 의약외품, 위생용품, 의료기기, 화장품, 공산품, 캔디, 차(茶類)와 음료도 있습니다. 약국에서는 이처럼 매우 다양한 제품군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산다(買)는 쇼핑의 의미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국의 약사에게 이런 호칭, 예를 들면 “저기요”와 같은, 정체불명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조금 더 들어가 까요. 감정을 배제한 이성적인 분석을 위해 굳이 다음과 같은 딱딱한 형식을 빌려왔습니.^^


 각 호칭별 주해(註解)

 

1. 사장님

  (약국의) 우두머리로 (약국) 업무의 최고 책임자라는 사전적 의미를 담아, 주로 할인이나 선물을 원하는 사람들이 쓰는 호칭

 비교적 호의적인 호칭이다. 당신이 약국의 주인임을 나는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여기 주인 나와!" 할 때는 물론 예외지만.) 약국은 개인사업자의 ‘소매’ 사업장이긴 하지만 약사 아닌 사람은 개설할 수 없는 의료 기관이다. 의사 아닌 사람이 주인인 소위 사무장 병원이 불법이듯 만일 그런 약국이 있다면 불법이다. 따라서 약사가 아닌 사람이 주인인 약국은 있을 수 없으므로 약국 사장이란 호칭은 '외가집'이나 '역전앞' 같은 중어적 표현(pleonasm)이 된다.


2. 약국 여사님

  아프지마오약국의 특수 상황에서 비롯된 호칭으로 '마트 약국의 나이든 여자'란 의미를 가진다.

  마트 내 나이 든 여자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에서 비롯된다. 성을 붙여 O 여사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성을 모르는 경우에는 라면 여사님, 식음료매장 여사님, 아가방 여사님, 허시파피 여사님 등으로 부른다. 대개 마트의 젊은 직원들이 이 호칭을 쓴다. 아프지마오약국의 대표약사가 계속 정정해 주고 있으므로 마트 신입직원들은 대부분 한소리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사모님

  진부한 사회적 편견에서 비롯된 호칭. 사모님의 '남편'을 가정하고 쓰는, 상상력(물론 잘못된)을 동원한 호칭.

  어떤 장소에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일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남자가 사장일 것이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호칭이다. 이럴 때 여자는 우습게도 사모님 혹은 아주머니로 불린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으면 무조건 부부라고 생각하므로 대표약사를 사모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반드시 약국의 나이 든 남자직원을 사장님이라 부르는 정형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내가 가끔 근무약사들에게 하는 농담 같은 퀴즈가 있습니다. 


퀴즈. 아프지마오약국에 다음과 같이 네 명의 약사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이 약국에 와서 신뢰를 보이는, 혹은 권위를 부여하는 순서를 매겨보시오. 

 1. 나이 든 남자 약사

 2. 나이 든 여자 약사

 3. 젊은 남자 약사

 4. 젊은 여자 약사


 맞추셨나요?

 정답은 1,3,2,4 순입니다.    

 

 사전 정보나 안면이 없을 때 사람들은 연장자, 그리고 남자를 우선적으로 권위가 있다고 느낍다. 그리고 신뢰합니다. 젊음에 대한 동경이 지나쳐서 동안크림이며 동안수술 같은 상술까지 등장했지만 적어도 약국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매우 부당하지만 그래서 젊은 여자 약사는 환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나도 순위가 2등밖에 안되니까 김 약사는 나보다 더 노력해야 해요. 아셨죠?)

       

 물론 이건 말 그대로 내 깜냥의 분석일 뿐입니다. 내가 말한 이런 미세한 차이를 의식하고 호칭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요. 아무려나, 동네 의원에서 의사에게 저기요, 아줌마, 심지어 나처럼 아무리 나이보다 젊게 보여도(^^) 언니라는 호칭을 쓰지는 않을 테니, 친근감의 표현이겠거니 하고 웃어넘기기에는 참으로 억울하고 서운한 측면이 있습니다.

 

 호칭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정도의 양식을 가진 사람만이 약국에 오는 것도 아닌 게지, 체념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대접을 받을 만한) 호칭에 합당한 짓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근무약사들에게도 늘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환자가 달라는 대로 내어주는 건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다 할 수 있어요. 이럴 때 과연 약사의 직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실력과 품위로 환자를 압도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운이 부끄럽지는 않아야 할 테지요.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약사 가운을, 내 좋은 옷 더러워지는 것을 막으려고 입는 작업복 정도로 생각하는 약사를 아주 싫어합니다. 가운은 반드시 깨끗이 빨아 정성스럽게 다려 멋지게 입어야 할 이유를 가진, 신뢰와 권위와 정체성의 상징물입니다.)


 그러니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 정성을 다해야 하겠죠. 비록 그 사람이 오백 원짜리 거즈 하나를 필요로 하든, 비싼 광고(하는 연예인과 광고회사에 지불하는) 비용까지 모두 감당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증상도 얘기하지 않고 특정 약 이름을 대면서 다짜고짜 그거 달라고 하든 말입니다.


 어쨌든 나는 언니와 아줌마와 저기요, 그리고 선생님의 틈새에서 오늘도 선생님 소리 듣는 그날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때로는 더는 참지 못하고 한국어가 아직도 서툰 베트남댁을 가르치느라,

 "여기는 약국. 약국에서는 언니 아니고 약사님, 아니면 선생님. 알겠어요?"   

라며 앞서가기도 하지만요. 그리고 당최 분류가 불가능한 다음과 같은 기습 공격도 있지만요.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립다.  

  “선생님!”  

 앞으로 나와서 '선생님'인 내가 말합니다.  

  “네. 뭐 필요한 게 있나요?”

 환하게 웃으며 돌아오는 답.

  “선생님, 저 동전 좀 바꿔주세요.”        


 오. 마이. 갓.

 인생 참 녹록치 않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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