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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Apr 25. 2019

아이의 집은 어디일까

 동생의 해열제를 사러 왔다고 했다. 심부름을 온 아이는 너무 작고 팔다리가 앙상해서, 이렇게 어리고 약한 아이를 한밤에 약국으로 보낼 만큼 위급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말하는 품은 제법 나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학령기 아동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여린 몸피였다.

 

 병에 든 시럽 하나를 내어보이자 가격표를 보더니 사오라는 해열제는 2천 5백 원이었다며 아니라고 한다. 그럼 어머니께 전화를 해보자 했지만 난감하게도 아이는 번호를 모른단다. 같이 온 여자아이의 키가 좀 더 커서 누나인지 물었으나 친누나는 아니고 그냥 함께 왔다며 모르쇠로 시선을 피한다.

 

 그러는 사이 다른 환자를 응대하느라 그 무리의 아이들이 어떻게 어디로 가 버렸는지 미처 챙겨보지 못했다.

 

 2천 5백 원짜리 시럽이 뒤쪽 약장에 있었는데 괜히 주인 여자의 눈치가 보여, 꺼내와서 보여주지도 못한 자신이 한심하고, 화가 났다. 브레이크 타임이 절실했다. 


 무작정 자리를 떴지만, 막막했다. 생전 처음 가본 지역이기도 했고, 그 약국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못 되었을 때라 모든 것이 낯설었다. 다행히 2층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무빙워크 앞에 의자가 세 개쯤 있던 것이 기억났다.  

 

 놀랍게도 아이가 거기 있었다. 상자 하나를 발치에 놓고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다.

 

   “너 아까 약국에 왔었지? 집에 아직 안 갔니?” 

   “네.”

   “그런데 왜 혼자야? 같이 있던 누나는?”

   “누나랑 형들은 서점에 갔어요.”

   “너도 같이 가서 책을 보지 그랬니.”

   “전 이거 지켜야 해요.”

   “착하구나. 그런데 약을 못 사서 어떡하지. 엄마가 기다리실 텐데. 집은 요 근처야?”

   “멀어요. 그리고 집에 엄마 없어요.”

   “안 계셔? 약을 사오라고 널 이리 보내고, 엄만 나가신 거야? 그럼 넌 이 먼곳까지 어떻게 왔어?”

   “자전거 뒤에 타고 왔어요.”  

 

 대화를 더 이어가기 힘들었다. 내 짐작은 잘 맞지 않았고 상상만으로 던지는 질문은 점점 더 많은 의문을 낳았다. 아이에게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이 있을 터였다. 경계하지 않고 고분고분 답을 하긴 했지만 계속 질문를 던지다 보니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감정을 이입해 아이가 뭔가 대단히 안쓰럽고 불우한 처지에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자신이 좀 우스워졌다고 할까.

  
 당시 나는 내가 과연 그 약국을 맡아 할 수 있을지 가늠하고 있던 중이었다. 내가 만일 정말 하게 된다면 다음에 아이가 다시 왔을 때 어머니가 사오라신 꼭 맞는 해열제를 주거나 혹은 아이의 진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 비겁하게도 의문을 해결하려는 어떤 부담도 지려 하지 않았다.


 아이는 정말 고아원 같은 복지시설의 아이인지도 몰랐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중동의 하늘이 무척 검고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 


 얼마 안 가 나는 그 약국을 인수했고 지금까지 경영하고 있지만 그 뒤로 아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실제로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아이(혹은 선의)를 빙자한 내 욕망의 투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누군가 일부러 간신히 가라앉은 앙금을 휘저어 탁한 물을 만들기라도 하듯 시도 때도 없이 그날 일이 떠올랐다. 아동학대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면 특히 더했다. 한 어린이 사체 유기 사건은 공교롭게도 약국이 위치한 지역 인근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내게 가느다란 불빛 하나가 보인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러서였다. 


 한 페이스북 친구(이하 페친)를 통해 난생 처음 그룹홈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다음의 우리말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룹홈

어려운 환경에 처한 노숙자, 장애인, 가출 청소년 등이 자립할 때까지 자활의 꿈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든 시설. 또는 그런 봉사 활동이나 제도 


 우연히 그 페친을 통해 한 그룹홈에서 아이들 통학에 필요한 차량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용기를 내어 조그마한 성의를 보탤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의 페친은 자신의 프로필에 ‘그룹홈 OO네 후원회장’이라는 직함 아닌 직함을 밝히고 있긴 하지만 단순히 어디를 후원하는 역할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깊고 너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같은 평범하고 소심한 사람들이 쭈뼛거리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북돋우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문화상품권 몇 장, 연탄 몇 장, 책 몇 권, 계란 몇 판의 힘을 아는 그는 서점하는 사람은 책으로, 계란 파는 사람은 계란으로, 수입보청기대리점은 본사와 조율해 보청기로, 차가 있는 사람은 기사 노릇으로, 식당을 하는 사람은 밥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각자의 깜냥으로 기부할 수 있도록 꾀하고 조율하고 다독이면서 우리 모두에게 본디 존재하는 선한 본능을 깨운다. 


 최근에는 자신의 식당 개업선물을 문화상품권으로 받아 (‘상품권 회수운동’이라 우겼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도록 각 중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많은 소액 기부자들을, 깜찍하게도 몽땅 조직에 넣었다.     


 이 사이비(!) 조직에는 대표도 있고 부대표도 있으며 원내대표에 원내 부대표 대변인까지 있다. 물론 비서실장도 있다. 

 태권도장 대표는 당대표 경호실장이며, 사무총장에 사무처장도 있고 무수한 땡땡 위원장을 만들고 그 위원장들의 비서실장까지 조직에 욱여넣었다. 멀쩡하게 굴러가는 조직에 비대위까지 있다. 방송인들은 수석대변인에 당 대변인, 원내 대변인, 원내 부대변인으로 죄다 영입했다. 


 그밖에 기막힌 작명술로 급조(?)한 자리는 다음과 같다.    


하하호호웃음병 전염/살포 TF팀

생활 속 스트레스 줄이기 생활 건강 청년포럼

건강한 먹거리 생산지원 단장

웃음 미소 확산 협려단

버럭 화내지 않고 하루보내기운동 본부장

막걸리와 함께 하는 인문학기행 TF팀

안전한 등하굣길 홍보위원장 

아빠들 10시 귀가 추진 공동위원장

육아에 지친 엄마 활력 드리기 TF팀

조건 없이 우리의 아이들 따스하게 보듬어주기 홍보위원장

청소년의 아픔 공감 공동위원장


  지역 특성상 공군참모총장도 있는데 현재 운전병을 모집 중이라니 많이들 지원하시길.^^    


 한번도 본 적 없는 우리 조직원들이, 각자 있는 자리에서 불편해하지 않고 또 어려워하지 않고 내재된 선한 의지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만드는 그의 빛나는 아이디어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덕분에 내가 조금이나마 마음의 빚을 덜고 빛이 비치는 곳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오늘도 그는 누군가 집을 필요로 하고 책을 필요로 하고 돌봄을 필요로 한다고 조직원들을 협박(?)한다.    


 나는 아이의 집을 찾아줄 수 없었지만 우리는 아이의 집을 찾아줄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선한 의지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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