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제 사진이 아닙니다
폰을 소매치기 당한 후 마음을 비우고 나니 딱히 아쉬울 것이 없었다.
사진으로 대충 찍어 기억하려던 것을 손글씨 메모로 대신하고, 풍경은 마음에 꼭꼭 담았다.
"설령 현실을 거울로 비추는 것처럼 색이나 다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 가능할지라도 그렇게 만들어낸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에 불과하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고흐였다.
사진에 불과하다.. 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 내겐 잃어버린 휴대폰에 담았던 사진들이 조금은 아쉽다.
가장 아쉬운 건 파리 생모흐 (Saint Maur)가에 있는 빛의 아틀리에 (atelier des lumiere)에서 찍은 Van Gogh, La nuit étoilée 동영상파일이다. 고흐의 작품들을 음악(클래식, 팝, 재즈)과 함께 영상으로 구성한 작품이었으니 사진으로는 그 감동을 모두 담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빛의 아틀리에는 애초 주물공장이었다고 한다. 아래 두세 개 층을 터서 전시실을 만들고 위층은 주거시설로 쓰는가 생각했을 정도로 평범하고 낡은 아파트처럼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저수통, 저장탱크, 기둥 등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유로운 촬영을 허용해 기둥과 사람들, 탱크 사이로 혹은 2층 화장실 벽을 캔버스 삼아 펼쳐진 화면을 동영상으로 찍었었다. 신기하게도 파리의 미술관들은 사진이든 촬영이든 모두가 가능했다. 촬영을 금지하는 한국이 이상한 건가?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까마귀가 있는 밀밭>에서 검은 까마귀가 날아오르던 순간이라니.
혹은 <아몬드 나무>에서 하얀 꽃이 피어나고 꽃잎이 바람에 흩어지는 광경이라든지.
<감자 먹는 사람들>이 앉은 식탁 위 전등이 조금씩 흔들리며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환하게 밝히는 화면도 마찬가지였다.
감동이었다.
그때 마음에 깊이 남은 것들을 제주도에서 (마스크를 쓰고^^) 다시 만났다.
제주도 성산읍에 있는 <빛의 벙커>에서도 작품을 상영(전시?)하고 있었다.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곳을 민영화한 곳이라고 했지만 파리의 <빛의 아틀리에>처럼 천장이 높지 않아서 영상 속 그림들은 다 평면적으로, 말 그대로 납작하게 보였다.
아뿔싸.
앞서 전시된 고갱을 (그것도 동영상으로) 찍고 나자 내 휴대폰의 배터리가 그만 아웃되고 말았다.....
역시 나의 고흐는 마음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구나.
일행 중 한 분이 나를 찍어주고, 사진 몇 장도 나눠주었으나 내가 찍지 않은 사진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리고 해바라기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식탁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도 모두 내가 찍은 것은 아니다...
노트북 사진 파일에서 <파리>는 여전히 빈 폴더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