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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Jan 14. 2022

까칠해도 괜찮아

 우리 세대가 어렸을 때는 (이라고 쓰고 라떼는 이라고 읽는다) 까칠하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지 않았다. 피부나 털이 윤기가 없고 거칠다는 사전적 의미의 까칠하다만 있었다. 부드러운 천의 반댓말인 까칠한 천, 고슴도치의 까칠한 털 이렇게.

 언제부터 사람에게, 또 한 개인의 특성으로 까칠하다는 말을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엣날에는 사회성이 없다거나 비사교적이라거나, 원만하지 못하다거나 모가 났다거나 하는 표현을 썼다. "친구가 없다"는 말도.

    쟤는 친구가 없어.

  인격적 결함에 대한 대표적인 은유이다.

    쟤랑 놀지 마.  

  치명적인 조리돌림이다.

 

  며칠 전 지인과의 대화 중에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써야 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어쩌면 나는 왕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수적인 지방 도시에서 남의 이목과 평판에 무심할 수 없는 평범한 부모님 슬하에서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 그런 딸이 될 수는 없었다. 버텨야 했다. 나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다른 아이들과 생각이 달라서 많이 힘들었던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어른이 없었다.  나는 늘 내가 문제라고 여겼고 맞추려고 노력했다. 때로는 사이를 유지하려고 마음을 숨기기도 했다. 나를 잃기도 했다.  

 그렇지만 크게 노력하지는 않았는지 내게는 친한 친구가 별로 없다. 드러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거나 인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아는 나이가 되었다고 할까.

 한때 (그것도 꽤  오래) 친했던 친구와 멀어지는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사람은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진화하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40년 전의 내가 아니고, 40대의 나도 아니다.  

 그대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나요. 나를 제대로 알기는 하나요? 대체 언젯적 나를 기억하는 거죠....

 

 사람들에게 맞추느라, 비숫하게 보이려고 애쓰느라 많이 고통스러웠다. 그것으로 벌은 충분하다.

 나는 좀 달랐을 뿐이고, 내가 태어나 자란 시간과 공간이 특히 나를 모나 보이게 했을 뿐이다. 학교가 같다고,  같은 고향이라고, 한동네 산다고,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다 같은 생각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한부모에서 나고 자란 형제도 얼굴이 다르듯이 다섯 손가락은 각각 제 모양과 가능을 따로 가진다.

 그렇다고 내가 반사회적 인물이거나 사이코패스는 아니니까, 좀 특이한 인물 혹은 4차원 인간쯤으로 덮어줄 줄 아는 관대한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더 좋았겠지.  아무리 좋은 게 좋다고 두루뭉술 덮는 위선의 문화가 판치는 사회라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면 다 나쁜 사람인가 뭐.

  이제 나는 마음껏 까칠하게, 그리고 착하게 살고 있다.

  언젠가 내 브런치에 "그럴 줄 알았다"는 댓글이 달린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쯤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 댓글이 어디쯤 들어있는지도 지금 잘 모르겠다. 이런 나는 퍽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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