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가 그 고양이를 처음 본 건 아마 세달 전 쯤이었을거야. 녀석은 갈색 털에 검은 세로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였는데, 매일아침 출근길 버스정류장 담벼락 아래에서 아주 여유롭게 누워있더라고. 아침마다 녀석을 볼때면 어느날은 부럽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애처롭기도 했지.
나는 새로 들어간 직장일에 적응하느라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였어. 게다가 이전 직장에서 3년이나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즉흥적으로 이직을 결심한 터라, 몸과 마음이 엉망이었지. 그렇잖아. 이별 뒤에 이직이라니.
특히 오늘은 비가 많이 온 다음날이라 축축하고 덥고 습한 아주 불쾌한 날씨였지. 아직 신입이라 사수의 눈치를 보면서 긴 소매의 양복슈트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지. 넥타이때문이었는지 날씨때문이었는지 오늘은 그 갈색고양이가 참 거슬리더란 말이야. 출근하기 싫은 날팔자좋게 누워있는 고양이를 바라보는건 맨정신으로는 힘든일이잖아.
그래서 나는 정류장 담벼락앞에 있는 벤치에 무작정 앉았지. 그리고는 몰래 노트북 가방 한 켠에 넣어둔 미니와인을 다짜고짜 꺼냈어. 회사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몰래 탕비실에 가서 종이컵에 따라마시곤 했거든.
나는 찰칵 소리가 나도록 미니 와인의 뚜껑을 열고 병의 입구를 코앞에 바짝대고 향을 맡았어. 더 깊은 향을 느끼기 위해서는 시각적 자극을 차단하려고 눈을 감자, 와인향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순간 내 주변 버스 정류장의 공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지. 눅눅하던 공기가 뭐랄까 공기청정기라도 켠 것 처럼 맑아지더니 묘한 장미향과 마른 과일향이 섞여 났어. 아! 오해는 하지 말아줘. 그때까지도 나는 와인 향만 맡고 다시 출근을 준비하려는 성실한 직장인이었으니까.
내가 꺼낸 와인은 2020년 산 까르베네 쇼비뇽이었는데, 거대한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내는 싸구려와인과는 달리 작은 캘리포니아 가족단위 와이너리에서 직접 경작하고 수확해서 만들어내는 제법 괜찮은 와인이었어.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는 매니아들이 생기기도 했고 말이야.
그렇게 조금 기분 전환을 하고 다시 와인 뚜껑을 닫으려고 했어. 그런데 그순간,
담벼락에 있던 회색 고양이가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와인 뚜껑에 있던 와인을 할짝할짝 핱고 있는거야! 몸에 있는 검은 줄무늬가 사라질 정도로 주름을 깊게 진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눈웃음까지 지으면서 말이지.
나는 고양이에게 물었어.
“혹시 와인을... 좋아해?”
고양이는 잠시 행복감에 젖은 얼굴로 핱던 것을 멈추더니 나를 쏘아보며 대답했어.
“당연하지. 캘리포니아 와인이잖아. 이런 날씨에 캘리포니아 와인을 이겨낼 재간이 있겠어?”
나는 말하는 고양이가 신기한건지, 와인을 좋아하는 고양이가 신기한건지
잠시 헤깔렸 지만 뭐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어. 그저 바쁜 아침 출근에 내 옆에서 함께 술을 마셔줄 누군가가 생겼다는게 중요했을 뿐.
“캘리포니아 와인 맛을 아는 고양이라니 반갑군. 요즘은 고양이들도 술을 마시나?”
“한잔 더 따라보라구. 내가 보기에 자네 출근은 이미 글렀어.”
그때 30분에 한 번 씩 다니는 주황색 광역버스 3100번이 마악 출발해서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순간 짜증이 솟구쳐 목을 옥죄는 연분홍색 넥타이를 풀어 길게 늘어뜨리려다 그만 넥타이가 풀어져 바닥에 떨어졌고, 지나가던 자전거는 휙 하고 소리를 내며 무참히 넥타이를 밟고 가버렸지 뭐야.
“잊어버려. 그 따위 넥타이는 애초에 자네에게 안 어울렸다구. 얼마 전 헤어진 자네 여자친구처럼 말이야.”
나는 화가 나서 고양이를 휙 쏘아보았어.
고양이는 두 번 째 와인 잔(뚜껑)까지 이미 핱아 마신 뒤 살짝 눈이 풀려있는 것 같았지.
“함부로 말하지마. 그녀는. 그녀는. 그러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와인병을 들고 벌컥 벌컥 들이켰어. 지나가는 행인들은 아무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어. 그저 술취한 행인이 아침까지 와인을 혼자 마셔대는 볼상 사나운 풍경정도로 생각하는 듯 얼굴을 찌뿌리고 지나갈 뿐이었어.
“아무도 너를 신경쓰지 않아.” 와인을 좋아하는 회색 고양이가 말했어.
“뭐라고?”
“아무도 너를 신경쓰지 않는다고. 그러니 니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그러더니 고양이는 비어있는 뚜껑을 툭툭하고 앞발로 쳤고, 나는 뚜껑에 와인을 넘치도록 듬뿍 따라주었어.
“난.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서른이 넘도록 진짜 하고 싶은게 뭔지도 모르겠고. 그저 삶의 전부였던 여자친구까지 떠난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야야할지 모르겠다고.”
와인을 한잔 더 들이키자 산소가 들어가서 부드러워진 와인은 더 매끄럽게 식도를 타고 넘어들어갔지.
고양이는 세번째 잔까지 모두 핱아 마신뒤 몽롱해졌는지 눈빛이 어디를 향하는 지 모른채 앞을 보며 속삭였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건 없어. 인생에 정해진 장르는 없다고. 와인을 좋아하는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넥타이가 싫은 인간은 그저 그대로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거라구. 와인은 잘 마셨네. 또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와인으로 기회가 된다면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 안녕."
고양이는 야옹 소리를 내며 담벼락으로 뛰어오르더니 담벼락을 따라 기어가 천천히 멀어졌어. 살짝 비틀거리는 것도 같기도 했지.
나는 남은 와인을 모두 마셨어. 정신을 차린건지 취한건지 모르지만, 나는 다시 버스를 기다렸지.
버스도 그녀도 언제고 다시 오기를 바랄뿐이야. 아 물론 와인을 좋아하는 고양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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