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_혁명의 도시

소설

by mina

space_쿠바 혁명광장 & 말레콘 비치




여행을 가장한 출장은 질색이다.

여행은 여행이고 출장은 출장인데, 이 둘을 어찌 하나로 모으란 말인가.

부장은 나에게 미안했던지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다녀와. 딱 하루만 현지 업체와 미팅을 하고 나머지는 푹 쉬다오라고.”

라고 하며 일주일간의 출장겸 여행을 권유했다.

부장은 현지업체와의 미팅날짜가 둘째 딸의 돌잔치와 날짜가 겹쳐 도저히 빠질 수 없으니,

자유로운 네가(결혼하지 않은 네가) 자유로운 나라인 쿠바로(여행가기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라인 쿠바로) 가라고 했다.


사실 요즘 나는 지쳐있었다. 일에 번아웃이 왔고, 사랑은 떠나갔다.

7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져 모든 남녀관계와 모든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끼는 참이었다. 큰 포부를 가지고 대학원을 마치자 마자 취업을 했다. 2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며 빠듯하게 돈을 모아 유학을 떠나려는 원대한 계획은 흐지부지됐다. 이도저도 아닌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이 9년째 이어지고 나는 하루하루를 그저 견디고 있었다.


그런 내게 ‘쿠바’라니! 쿠바는 지나치게 혁명적인 도시가 아닌가


쿠바는 내게 대학시절 선배들이 거론하던 ‘체게바라’의 나라로 남아있다.

작은 국가지만 여전히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자존심이 강한 나라. 모든 게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이상적인 국가 모델.

나는 지금 태평양 상공을 지나 이상과 현실 사이 어딘가를 배회하는 중이다.

이제 곧 쿠바를 마주할 참이다.



쿠바에서의 일주일은 푹푹 찌는 적도의 열기때문인지, 체온, 호흡과 맥박을 모두 높여 영혼까지 들뜨게 만들었다. 열기가 나를 완전히 관통해 나의 몸 안과 밖을 모두를 휘감았다.


느껴보라고. 이 열기를. 이 뜨거운 도시를


까맣게 그을린 피부사이사이로 주름이 깊게 잡힌 클럽의 잡상인은 제법 능숙한 영어로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빈티지한 올드카들이 도시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은 나를 지구 반대편 공간과 전혀 다른 시간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쿠바의 명소인 혁명광장은 체게바라의 거대한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체게바라의 정신이 깃든 곳에 서있는 자신이 꽤나 진보적인 인간이 된 듯 사진을 연신 찍어대는 나르시스트들. 이곳은 ‘혁명의 정신’을 관광 상품화고 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말레꼰 비치 주변에 석양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광객사이를 걷다가 한적해보이는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자, 이내 어디선가 늙은 악단의 보사노바 연주소리가 들렸다.


재즈, 카리브해, 1950년대 올드카 그리고 체게바라.


현실과 타협해버린 올드 보이들이 그들의 열정과 청춘의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 쿠바야 말로 그들이 떠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나는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칵테일 ‘리브레’를 연신 홀짝 홀짝 마셔댔고 이내 취기가 돌았다. 술과 이국땅의 석양과 재즈에 취하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리움의 눈물이었다. 청춘의 시기. 그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뭐든 할 수 있던 열정이 그리웠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남자친구가 그리웠다. 무언가를 ‘꿈꾸고 갈망하던’ 그 시절 내가 무엇보다 그리웠다.



그 때, 누군가 나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왔다. 흐릿한 조명과 흐릿한 의식 속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긴 머리를 하고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제법 잘생긴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이내 영어로 같이 앉아도 되겠나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연거푸 그가 권하는 쿠바의 칵테일들을 마셨고 곧 술에 취했다. 그와의 대화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꽤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것 같다.

지구 반대편 이국의 땅에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나는 나의 삶의 유한함을, 무기력함을 토로하며 울었다. 수많은 갈망과 포부들이 사라진 지금 내개 남은 것은 무엇이냐 울부짖다가 테이블에 꼬꾸라져 잠이 들어버렸다.

어떻게 내 숙소로 돌아왔는지 기억에 나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를 느끼며 물을 한잔 마시고 다시 깊은 잠에 빠지기를 반복하다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샤워를 했다. 옷을 입고 커피를 한잔 타서 의자에 앉자 그제서야 어젯밤 그가 티테이블에 남기고간 메모지가 보였다.


한국에서 온 그대여,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의 감정을 아는 사람만이 될 수 있지요.

당신의 사랑, 그리고 함께 수반되는 그 모든 좌절의 감정들은 어쩌면 당신을 위대한 혁명가로 만들고 있는지도 몰라요.

자유와 해방으로 이끌어 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답니다.

오로지 나 자신만이 나를 해방시킬 수 있지요.

- 체 게바라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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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8klSlcZ4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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