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 껍질을 따라가는 밤

조용히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잔 하나를 비워냈다

by 서가

의외의 온기는 자주 아주 작고 사소한 형태로 온다.

이를테면 한밤의 골목 어귀에서,

불이 꺼진 식당들 사이 유독 오래 켜져 있는 전구 하나.

그 아래 작은 의자 두 개가 마주 보게 놓여 있다면,

그건 분명 누군가를 위해 미리 준비된 풍경이다.


그날 밤 나는 그 자리에 끌리듯 앉았다.

누가 남겨둔지도 모를 식탁보가 있었고,

조명 아래 놓인 조그마한 유리잔 하나가 괜히 나를 반긴 것 같았다.

메뉴판은 손때가 묻어 있었고,

종이 아래엔 단단한 목재 테이블의 질감이 느껴졌다.


그 공간은 처음이었지만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술을 권한 건 나였다.

"가장 덜 시끄러운 것으로 부탁할게요."


그러자 돌아온 건

라임 하나와 긴 얼음 두 개가 들어 있는 투명한 잔.

그 위로 천천히 무언가가 따라지고,

잔잔한 탄산이 그 표면을 흔들었다.


“섞이지 않는 술은 없어요.”

잔을 내밀며 주인이 말했다.


그 말이 묘하게 오래 머물렀다.

섞이지 않는 사람도 없다는 뜻 같아서,

나는 조용히 웃었다.


함께 나온 안주는 구운 토마토 위에 캐러멜이 살짝 덮여 있었다.

포크를 들자, 얇게 설탕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 감촉이 이상하게 멀리서 들리는 파도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내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장면들이

이 잔 위로 흘러들어갔다.


말하지 못한 말들이,

이별이라는 단어 앞에서만 작아졌던 마음들이

마치 이 공간에선 잠시, 허락되는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였다.

어쩌면 모두가 스스로를 들여다보러 온 건지도 몰랐다.

다른 누구의 말도 필요하지 않은 밤.

다만 잔 하나와 그 잔을 받아주는 누군가만 있으면 되는 그런 시간.


조명이 흔들릴 때마다

내 안의 감정들도 살짝 흔들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불안한 진동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

문득 그 잔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이름을 모른 채 기억하는 것이

어쩌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나는 요즘 들어 자주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돌아서며,

조명이 닿았던 그 자리에

내가 오늘 있었던 흔적 하나쯤은 남아 있기를

조금은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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