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단맛에 대해

지하철역 근처, 같은 자리의 같은 공차

by 서가

퇴근길은 늘 익숙한 것들로 채워진다.

백석역 8번 출구를 나와

두세 걸음이면 도착하는 마크트할레 지하.

나는 이 길을 셀 수 없이 걸었다.


백석역이라는 이름엔 늘 무언가 덜 마무리된 느낌이 있다.

끝나지 않은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한 마음,

지우지 못한 노트 속 낙서 같은 것들.


그날도 그랬다.

유난히 긴 회의,

쓸데없는 오해,

그리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린 날.

하루가 무겁게 어깨에 내려앉은 채,

나는 늘 그렇듯 같은 자리에 있는 공차로 향했다.


주문은 키오스크로 한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블랙 밀크티, 당도 50, 얼음은 less, 그리고 펄 추가.

이건 내 안에 오래된 공식처럼 굳어 있다.

그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루틴.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음료를 주문한다.

어떤 사람은 새로 나왔다길래,

어떤 사람은 덜 달게 해달라고,

어떤 사람은 아주 많이 달게 해달라고.

그리고 나처럼,

그냥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고.


때때로 단 건 방어다.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을

겉면에서 살짝 덮어주는 얇은 시럽 같은 것.

입안에서 퍼지는 당도의 흐름을 따라

마음도 잠시 덜 아픈 방향으로 미끄러진다.


공차의 블랙 밀크티는 한결같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홍차향.

적당히 젖어드는 우유의 감촉.

그리고 정직한 단맛.


그 안엔 무언가 오래된 위로가 들어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다정함 같은 것.


나는 자리를 잡고 앉는다.

오늘은 다 마시지 않아도 좋다.

마시다 보면,

어쩌면 나아질지도 모르니까.


공차는 혼자 마시기에 좋다.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조용하며,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공간.


종이컵에 담긴 밀크티를 손에 쥐고

나는 조금씩 식어가는 하루의 감정을 되새긴다.

사실 많은 일들이 다 의미 있는 건 아니다.

말실수 하나, 타이밍이 어긋난 시선 하나,

조금 늦은 답장 같은 것들이

하루를 흔들어 놓을 때도 있지만

결국 다음 날은 또 온다.


나갈 때쯤, 남은 음료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다 마셔버린 걸지도.


문을 나서기 직전,

뒤에서 누군가 "타로 밀크티 당도 70 나왔습니다"라고 외쳤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순간,

그저 한 잔의 음료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이

이 안에도, 밖에도,

어딘가 참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단맛을 계속 마실 것이다.

어느 날은 위로처럼,

어느 날은 방어처럼.


그리고 언젠가,

이 맛도 어딘가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해도,

오늘의 나는 기억할 것이다.

지하철역 근처,

같은 자리에서,

익숙한 단맛을 꺼내 주던 공차의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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