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사라져도 괜찮은 곳에 다녀왔다
그는 그날 특별히 무언가를 기대하고 나선 건 아니었다. 계절도 시간도 딱히 의미 없던 하루, 낡은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선 건 단지 집 안의 정적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초대도, 누구의 전화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외롭다고 느낀 건 아니었다. 고요함이라는 건 때때로 소음보다 더 분명한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 그는 그 고요를 잠시 내려놓을 공간이 필요했다. 사람이 많지 않은 곳, 너무 친절하지도, 너무 냉랭하지도 않은 곳,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괜찮은 장소.
지하철을 타고 생각보다 먼 곳까지 왔다. 익숙하지 않은 역 이름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들어선 건물은 쇼핑몰이었다. 텅 빈 복도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냉방기 소리와 미묘한 팝콘 냄새, 그리고 어둡게 조절된 조도 아래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둔탁하게 깔려 있었다. 간판 위에는 검은 배경에 흰 글씨로 영화관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유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유 없는 선택이 그날의 분위기와 더 잘 어울렸다.
무인 발권기를 지나 상영관 입구에 들어섰을 때, 그는 마치 오래전 익숙한 곳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팝콘도 음료도 들지 않았고, 좌석 번호조차 기억하지 않은 채 그는 관성처럼 움직였다. 스크린을 마주한 순간, 그제야 그가 찾고 있던 ‘말 없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스피커는 말이 없었고, 천장조명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의 어둠은 누군가의 이야기보다도 먼저 그를 안아주었다.
스크린 속에서 인물들은 웃고, 싸우고, 사랑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어떤 감정도 과하게 이입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 밖에 남아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마치 주인공이 아닌, 카메라 바깥의 스탭처럼. 그는 오히려 상영관 안에 있다는 사실보다, 그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몸을 깊게 기대고, 눈을 감지도 뜨지도 않은 채 그저 존재했다. 그 자체로 충분한 시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조차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몇 사람은 빠르게 나갔고, 누군가는 핸드폰을 켰고, 어떤 이는 버려진 팝콘 상자를 밟으며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스크린에 흐르는 이름들을 보았다. 그 이름들이 현실과 아무 상관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깊은 현실감을 줬다. 자신도 어느 한 장면의 스탭이자 통과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 빛이 다시 강하게 눈을 찔렀다. 그의 그림자가 바닥에 선명하게 드리워졌고, 복도 끝에서 불빛이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잠깐의 휴식, 잠깐의 피난, 잠깐의 사라짐. 사람들은 영화관을 그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그날의 극장은, 말 없이 이름 없이 존재를 잠시 눌러둘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는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천천히 걸었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고, 누구의 기억에도 남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그 사실이, 가장 조용하게 흔들리는 날의 기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기록은, 빛이 꺼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 안에 남아 있을 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