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당신이 떠난 자리를 다시 걷는다
고속터미널은 늘 바쁘다.
누군가는 짐을 들고 서두르고,
누군가는 여행을 끝내고 무표정하게 걷는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멈춰 서 있다.
어디로 가는 것도,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닌 채로.
신세계백화점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멈췄을 때,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YONGPOONG.
흰색 간판 아래 조용히 자리한 영풍문고.
너무 익숙한 이름이라 몇 초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나는 무심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서점은 작았다.
예전처럼 큼지막한 매대도, 뻗어나가는 서가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됐다.
혼자 있는 데 익숙해진 사람처럼,
이 공간도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입구 가까이에 있는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눈에 익은 책들이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가볍게 손에 들어오는 문고본,
화려한 표지에 슬쩍 밑줄이 그어져 있는 시집들.
당신이 좋아하던 그 책도 있었다.
표지를 쓸어보다가,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책을 내려놓는다.
아직도 그 문장들을 읽을 자신이 없다.
문구 코너엔 리딩 타이머가 놓여 있었다.
“독서 시간, 직접 재보세요”
당신이라면 웃었겠지.
책 읽는 시간을 재는 게 무슨 의미냐고,
우린 시간보다 마음으로 읽는 거라고.
그 말을 이제는 믿고 싶지만,
나는 여전히 시간을 신경 쓰며 책을 넘긴다.
혼자가 된 뒤로는
모든 것이 숫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서점 중앙에는 계단식 공간이 있었다.
작은 소파와 푹신한 방석이 놓인 그 자리에 앉아
나는 아무 책도 펼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아이를 데리고 왔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채 조용히 걷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서점을 찾을까.
책을 사기 위해서?
지식을 얻기 위해서?
나는 지금
아무것도 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조용한 공기 속에
조금만 더 머무르고 싶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갔던 서점은 없어졌다.
그 자리엔 신발 가게가 들어섰고,
당신이 밑줄 그은 책은 아직도 내 책장 안에 있다.
어쩌면 나는,
당신과 마지막으로 나눈 그 침묵을
서점이라는 공간 안에서 되찾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같은 책 앞에서 웃었던 기억은
언젠가부터 내 안에서 가장 조용한 빛으로 남아 있다.
책을 읽지 않고도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아무 문장도 넘기지 않고,
책등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한 순간쯤 괜찮아질 수 있다.
그게 서점의 힘이라면,
나는 앞으로도 종종 이곳에 들러
아무것도 사지 않고,
아무것도 읽지 않은 채
잠시 앉아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땐 해가 조금 기울어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했고,
지나는 말들이 공기 속을 부유했다.
그 안에서 나는,
당신이 떠난 자리에
서점이 생겼다는 사실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리를 다시 채운 건
다른 사랑도, 다른 사람도 아닌,
고요한 책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