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이 끝나는 자리에서

더 조용한 여름의 재회

by 서가

비가 그치고, 골목엔 한 겹의 열기가 깔려 있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러나 뭔가 눅진하게 눌러앉는 여름 저녁의 공기.


그는 양복 윗단추를 풀고

왼손으로 목덜미의 땀을 훔쳤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가장 밝은 간판을 향해 발을 옮겼다.


"살얼음 맥주 있어요."


입구 유리문에 붙은 문구였다.

시원해 보였다.

생각보다도 훨씬.


문을 밀고 들어서자

웜톤 조명 아래 작은 테이블들이 낮게 말을 걸어왔다.

벽엔 오래된 포스터와 간이 전등이 무심하게 붙어 있었고

테이블마다 놓인 키오스크가

가게의 연식을 간신히 현재로 묶고 있었다.


그는 구석 자리 하나에 앉아

500ml 생맥주를 주문했다.

잔에는 살얼음이 떠 있었고,

그것은 잠시 후

그의 목구멍을 통해

오늘 하루의 피로를 조금씩 녹여내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그는 두 잔째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팩을 멘 여자였다.

머리는 질끈 묶여 있었고

셔츠 소매는 말려 올라가 있었으며

눈가엔 땀이,

이마엔 작은 흠칫거림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지 못했다.

혹은 못 본 척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테라스 쪽 자리에 앉아 메뉴를 훑었다.

그가 앉은 자리와는 직각으로 놓인,

그러니까 서로 등을 질 수 있는 안전한 거리였다.


그는 조용히 셋째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 잔의 맥주가

그녀의 첫 잔과 비슷한 타이밍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뒷모습, 골목 끝을 향해 사라지는 붉은 우산,

여름밤 특유의 느릿한 공기.


둘 사이에 특별한 인사도,

눈빛도,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는

분명히 같은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그가 떠나기로 마음먹은 건

넷째 잔을 끝내고

어딘지 모르게 목이 아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계산을 마치고 일어섰을 때,

그녀는 여전히 테라스 쪽을 보고 있었다.

잔은 비어 있었고,

눈은 멀리 머물고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여름밤의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가 돌아보았다.

잠깐이었고,

그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어쩐지 등 뒤로 작은 인사 하나가 스친 것 같았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골목은

이따금 그렇게

말 없는 재회와

의미 없는 작별로 가득 찼다.


맥주는,

가끔 그럴 때 마시기에 딱 좋은 술이었다.





사진 출처 : 정발산 웨스턴돔 술집, 역전할머니맥주에서 살얼음맥주 한 잔 하고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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