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쉼표, 늦깎이 방학생의 일기

[프롤로그]

by 심온

스무 살의 희망찬 얼굴, 서른 살의 당당한 걸음걸이…


시간의 물결은 잔잔히 흘러 예순의 주름진 미소가 떠오른다. 여든이란 나이는 축복받은 이들의 선물 같았고, 아흔이란 숫자는 아득한 안갯속에 가려져 있었다. 쉰 살의 모습은 어떨까? 반짝이는 검은 그랜저를 타고, 품격 있는 레스토랑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따뜻한 식사를 나누는 모습—이런 소소한 행복이 내 미래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그 달콤한 허상 속에서 살았다.


10년 된 중고차가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는 어느새 내 인생의 배경음악이 되어버렸고, "이번이 마지막 중고차"라던 5년 전의 다짐은 흐릿한 꿈이 되었다.


50km를 2시간이나 달려야 하는 꽉 막힌 퇴근길, 새 차를 향한 공상은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단골손님이었다. 하지만 이내 아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아파트 대출금도 버거운데 무슨 새 차야?" 여기에 아이들 학자금 생각까지 더해지자 가슴은 한층 무거워진다.


스물일곱, 첫 명함을 받던 날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잘 짜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40대의 나는 당연히 팀장일 거라 믿었지. 회의실 맨 앞자리에서 팀원들을 이끄는 모습을 그리며 가슴 한편이 부풀어 올랐다.


그때의 나는 별다른 야망은 없었다. '미래의 사장님'이란 화려한 타이틀 대신, 그저 '팀장님' 세 글자면 충분했다. 돌이켜보면 그마저도 과분한 꿈이었나. 결국 상사의 갑작스러운 퇴사라는 행운으로 겨우 팀장 배지를 달았을 뿐.


마흔셋, 막상 팀장이란 허울 좋은 명패를 달자 내 시선은 저 멀리로 향했다. 50대의 임원 자리.


마치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그 자리를 향해, 우리는 모두 끝없는 희망의 사다리를 오르는 시시포스가 되어버렸다.


40대가 화살처럼 지나간다던 누군가의 말이 가슴을 스친다. 그 진실을 깨달을 새도 없이, 40대는 이미 흐릿한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치열함이란 단어는 40대를 수식하기에 너무나 순진한 표현이다.


사춘기 자녀의 반항은 일상이 되었고, 아내와의 대화는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직장에선 입사 후배의 임원 승진 소식이 귓가를 맴돈다. '아직은 기회가 있을 거야'라는 자기 최면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회사라는 제단에 바친다.


그리고 가족과의 소통은? 차가운 스마트폰 화면 속 이모티콘으로 대체되었다.




퇴직이라는 절벽 앞에서 나는 한동안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새벽녘 천장을 바라보며 무의미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내 존재는 마치 진공 상태에 던져진 먼지 같았다. 그러다 문득,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허함이 새로운 시작점이 되어버렸다.


일주일 후, 나는 웃음기 없는 미소를 지으며 노트북을 펼쳤다.


일상의 틈 속에서 방황하는 한 직장인의 삶을 담은 중편 소설 한 권을 쓰고, 고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릴 적, 잠들기 전에는 꼭 들어야만 했던 창작 동화—수백 번 들려주었던 그 머릿속 이야기를 단편으로 한 권 완성했다.


이상하게도 글쓰기가 나를 부른다. 아니, 어쩌면 내가 글쓰기를 찾아 헤맸던 걸지도 모른다. 잠조차 달갑지 않다. 말이 필요 없는 이 세상에서, 키보드의 차가운 감촉이 오히려 따스하게 느껴진다. 모니터는 적어도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준다.


회사에서 써오던 딱딱한 보고서와 실적 위주의 말투는 이제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진짜 이야기들을 천천히 써 내려간다.


회사원으로 살면서 늘 쓰고 있던 거짓된 가면을 벗어던지고,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마주하려 한다.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이것이 더 진실된 모습이다.


이 글이 어디로 흘러갈지, 어떤 내용을 담게 될지 나도 모른다. 또 한 번의 서류전형 탈락 문자를 받고 쓴웃음을 짓게 될 수도 있고, 쓰고 있는 동화책 속 주인공처럼 달콤한 환상에 빠져들 수도 있다. 어쩌면 콘크리트 틈새를 뚫고 피어난 민들레 한 송이를 보며 헛된 희망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 중년의 숙명이라면, 나는 이미 그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이 모든 글들이, 이 모든 순간들이 누군가의 마음 한편에라도 살며시 스치기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내 모습이 쓴웃음을 자아내지만, '러브액추얼리'의 한 장면처럼 나는 또다시 중얼거린다.


"그래, 이걸로 충분해." 하지만 그 말이 거짓임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