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그리고 다음 날
오랜 대학 친구가 술 한잔을 제안했다. 실직 다음날을 함께 보내기에 제격인 친구.
종로3가의 어느 구석진 곰탕집에서였다. 처음 듣는 '따귀'라는 메뉴는 알고 보니 살코기 붙은 뼈찜이었다. 뜨거울 때는 꽤 괜찮았다. 고기를 씹으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의 내 처지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음식도 제때가 있나 보다.
나만큼이나 접대자리가 많은 이놈은 온갖 맛집을 꿰고 있다.
내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데 머리 큰 녀석이 들어서며 "어이~ 친구"라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 잘 지냈냐? 따귀 주문해 놨어. 뭘로 마실래?"
그날, 친구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있었다. 실직자와 실직자를 만드는 사람.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부서원의 절반을 내보내야 한다는 친구는 나보다 먼저 취기에 젖어갔다.
"곧 내 차례도 오겠지. 그건 그렇고... 와이프한테는?"
"사실 올해 초에 한번 말했었어. 회사 그만두고 싶다고... 너무 힘들다고... 같이 고민해 달라고..."
"그랬더니?"
"'무슨 소리야? 어떡하게?' 그러더라고. 그래서 버텨보려 했는데... 한 달도 안 돼서 진짜 그만두게 됐네.”
"버틸 수 없었어?"
"해야만 했어... 할 수밖에 없었어."
"흠... 그래서 와이프는 뭐래?"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슬리퍼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외투를 팔에 걸친 채 사무실을 나섰다.
차 키를 돌렸지만 내비게이션은 공허하게 빛났다. 목적지를 정할 수 없었다.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한 번, 또 한 번. 백미러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P에서 D로 기어를 옮겼다.
도로 위 이정표들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집으로 향하던 차의 방향을 틀었다. 광화문, 마포, 여의도… 그러다 '강화도'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바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자.
2월의 쓸쓸한 바닷가에도 사람들은 있었다. 셀카를 찍으며 환하게 웃는 그들이 마치 다른 세상의 존재처럼 보였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스쳤다.
갑자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이 불자 방금 전까지 떠들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창에 눈 꽃이 피어났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상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멀게 느껴졌다.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렸다. 아스팔트에서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며 발끝을 바라보았다. 눈 섞인 모래가 신발을 붙잡았다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드넓은 갯벌이 내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진동이 울렸다. 아, 오늘 약속이 있었지. 대화방을 열어 메시지를 남겼다.
"미안한데, 개인적인 일이 생겨서 오늘 저녁 일정이 힘들 것 같아.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후배들의 답장이 이어졌다. 배려 섞인 걱정의 말들. 스크롤을 올려 어제의 대화를 읽는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시죠? 내일 저녁은 어디서 볼까요?"
"광화문이 좋긴 하지."
"그럼 광화문에서 최대한 빨리 보시죠."
하루 전의 그 가벼운 대화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졌다.
희미한 구름층이 드리운 하늘 아래, 진동이 울린다.
짧은 순간에도 망설임이 깊어졌다. 전화를 받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씩씩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본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전화는 왜 이렇게 안 받고." 걱정이 묻어 나는 목소리였다.
"어..."
겨우 뱉어낸 한 마디. 그리고 나는 꼬박꼬박 대답했다.
약속을 취소해서 미안하다고. 웃지 못할 것 같았다고. 사직서를 냈다고. 바닷가에 와 있다고. 그냥 바다 보고 있다고. 밥은 먹을 거라고. 춥지 않다고. 지금은... 모르겠다고. 고마웠다고.
"선배, 나는 선배 존재만으로도 감사해요."
과거형으로 들렸던 모양인지 그녀는 내 존재의 지속을 바랐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목소리가 남겨져 있었다.
"선배."
"응?"
"바다 실컷 보고 와."
"응"
어느새 식당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부분 어르신들이었다.
"어쨌든 눈이 쌓이기 전에 길을 나서야 했어.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지. 그렇게 됐다고... 아무 말도 없더라. 그래서 그동안 속에 담아뒀던 말을 꺼내고 끊어버렸어. '나 정말 열심히 살아왔어. 노력했어. 그것만은 알아줘'라고..."
"휴..."
"근데 전화를 끊고 나니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젠장. 하... 주책맞네."
친구가 빈 술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의 입에서 목적지 없는 욕설이 새어 나왔다.
녀석의 눈도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