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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 떠난 기차 여행

쉼표, 그리고 셋째 날

by 심온 Apr 03. 2025

갈 곳도, 할 일도 없는 오늘은 잠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시계가 되어버린 걸까. 잠은 늦게 오고,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09:05. 눈을 감고 있는 것도 고통이다. 결국 이불 밖으로 발을 내민다.


바다가 필요하다. 바다가 보고 싶다. 잔잔한 갯벌 말고,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 기차가 필요하다.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지하철이 아닌 진짜의 기차를. 철로 위를 달리는 소리가, 지금의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것만 같다.


보조배터리와 책 두 권. 도망치기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서울역. 수많은 철로가 있는데 유독 바다로 향하는 길은 왜 이리도 적은 걸까. 강릉은 이제 지겹고... 


부산이다. 그래, 부산으로 가야겠다. 서울역은 예상대로 사람들로 북적인다. 서류가방을 든 사람들, 여행 가방을 든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나는 표 한 장을 끊고 대합실 한쪽 식당에서 국밥으로 허기를 달랜다.


미리 예매했어야 했는데. 창가 자리를 놓쳤다. 철로를 밟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그래도 기차는 기차다.


며칠 전의 기억이 여전히 날카롭게 남아있다. 잊어보려 백팩에서 책을 꺼낸다. 스마트팜으로 딸기를 키우는 작가의 이야기. 작가는 노력만 하면 비닐하우스 하나쯤은 혼자 할 수 있다던데. 농사 얘기만 꺼내면 다들 비웃는다. 


"농사가 장난이야?" 

"해봤어?" 

"시골 텃새나 알아?"


그저 ‘싶다'는 것일 뿐인데.


사람에 질려버린 요즘, 빨갛게 익어가는 딸기를 바라보며 조용히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햇살 가득한 낮에는 작물을 가꾸고, 고요한 밤에는 글을 쓰는 그런 소박하지만 충만한 일상. 무거운 한숨과 함께 책을 덮으며, 현실이라는 벽에 다시 한번 부딪힌다. 내 땅 한 뙈기 없고, 시작할 자본금도 없는 이 상황에서 꿈은 멀기만 하다.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감는다. 기차는 여전히 쉼 없이 달리고 있다.


부산. 태어나고 세 해를 보냈다는 이 도시를 나는 겨우 한 번 찾아왔다. 스물여덟, 광안리에서의 하룻밤. 


그때의 바다는 구실에 불과했다. 결국 게임방에서 밤을 새우는 것으로 끝난 대학 친구들과의 술자리. 하지만 그날 스쳐 지나간 바다가 이렇게 다시 나를 부를 줄은 몰랐다. 


늦은 오후의 광안리. 영하의 날씨에도 사람들은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듯 떠들썩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귀를 때릴수록 내 안의 공허함은 더욱 깊어만 갔다. 결국 이곳도 그저 또 하나의 관광지일 뿐.


사람 구경이 지긋지긋해서인지 산책 나온 반려견들에게 시선이 갔다. 멋스러운 개들이 주인과 나란히 걷고 있다. 가끔은 저런 무조건적인 사랑도 필요할 텐데. 손을 뻗어보지만 결국 허공을 쥘 뿐이다. 우리 집의 땅콩이도 사랑스럽지만, 저런 큰 개도 한번 키워보고 싶다.


모두에게 열린 바다. 하지만 누구의 것도 아닌,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다른 바다라. 조용히 서있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송정해수욕장. 지도상으로는 바다를 향해 고집스럽게 뻗은 모양새가 마음에 든다. 그전에 들르고 싶은 곳이 있다. 


용두산 공원. 비둘기 떼가 날아다니던 희미한 기억 한 조각. 세 살 배기의 뇌리에 박힌 행복이라는 게 얼마나 순수했을까. 하지만 너무 멀다. 내일로 미루자. 


난 이미 하룻밤을 결심했다. 


혼자서도 '식사'는 하지만, 식사라고 하기엔 모양새가 우습다. 포장마차라도 찾아야겠다. 자갈치시장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송정해수욕장 가는 길목이라 나쁘지 않았다. 


지도 앱을 열었다. '혼술'. 이제는 자동완성이 될 정도로 익숙한 단어. 일요일 저녁의 자갈치시장은 반쯤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좋았다. 사람 없는 시장 끝에서 마주친 검은 바다는 오히려 진짜처럼 보였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뺨을 때릴 때마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술이 당긴다. 혼술이라. 여행의 쓸쓸함을 더하는 단어지만, 오늘은 그게 필요한 밤이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깡통시장. 관광객들의 천국이란다. 비켜가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포장마차는 옛말이다. 


대신 '실내포차'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저 그렇다. 하지만 친절하다. 혼자의 내게 괜찮은 자리를 내어 준다.


꼼장어와 소주. 술기운이 빠르게 온다. 꼼장어는 짭조름하고 당근은 달다지만, 혀끝의 감각은 무뎌진 지 오래다.


"오늘 늦게나 내일 들어갈게"


나는 용감해졌다. 아니, 술기운 덕분에 무모해졌을 뿐이다. 단 몇 글자를 보내는데도 전자담배 두 개비를 태워야 했다. 결국 보냈다. 통보처럼.


"어디야?"


"부산"


"부산까지는 왜 갔어?"


"그냥 기차 타고 싶어서 서울역 갔다가 표 끊었어."


대화 끝.


다시 바다를 찾는다. 강릉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결국 똑같았겠지.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산책로를 걷는다. 인공적인 다리와 길들여진 바다. 관광객용으로 포장된 이 바다가 마치 내 모습 같다. 


사람들은 조명 아래서 셀카를 찍느라 정신없다. 그들의 SNS에서 바다는 그저 예쁜 해시태그일 뿐.


그래도 한 시간은 바다를 봤다. 소음 속에 숨어있는 파도 소리를 귓속에 새겼다. 이제 됐다.


편의점에서 캔맥주 네 개를 산다. 


호텔이라 쓰인 모텔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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