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그리고 셋째 날
비수기라 운 좋게 일반실 가격으로 오션뷰 객실을 얻었다. 작은 방이었지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았다.
창가에 서서 맥주 두 캔을 마셨다. 취기가 서서히 올라왔다. 두 캔이 과하진 않을까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괜찮을 것 같았다. 나머지 두 캔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누군가 마시겠지.
기억들이 흐릿하게 스쳐가도 휴대폰은 만지지 않았다. 홍보맨의 20년 습관이다. 취중 전화는 금물.
어느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어 커튼을 젖히자 햇살이 방 안 가득 쏟아졌다. 바다는 어제보다 한층 더 아름답게 빛났고, 어제의 투정은 무색해졌다. 뜨거운 물로 온몸을 풀어내며 여행의 피로를 씻어냈다.
호텔을 혼자 들어서던 어제보다, 혼자 나서는 지금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나는 바다 위로 펼쳐진 산책로에서 사진을 찍는다. 마치 어제의 그들처럼. 영하의 수면 위에서 쉬고 있는 철새들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적어도 나에겐 잠들 수 있는 따뜻한 방이 있으니까.
어제의 순간적인 용기는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다. 용두산 공원은 다음을 기약하자.
세 시간의 기차 여정이 짧게 느껴진다. 차라리 다섯 시간쯤 달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새마을호 표를 끊으며 창가 자리를 놓친 것이 아쉽지만, 그저 그러려니 받아들인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머리를 기대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과 함께 기차의 철컹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한 번, 또 한 번,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이 소리가 묘하게 마음을 달래주었다.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기차의 리듬에 몸을 맡겼다.
나는 회복되었나? 그럴 리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혼돈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억누르려 했던 신음 같은 한숨이 새어나가자 옆자리의 대학생이 흘깃 쳐다보았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차라리 잠이나 자야지.
대전역을 지날 무렵,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귀찮아서 무시했으나, 곧이어 알림과 전화가 쏟아지듯 들어왔다. 결국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노란색 창에는 알림이 가득하다.
“팀장님 소식 들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팀장님 연휴 지나고 날 한번 잡자고 하셨는데… 혹시 부서 이동 하셨어요?”
“안녕하세요 팀장님, 말씀 들었습니다 ㅠㅠ”
“형님 무슨 일이신 거예요? 전해 들었어요”
파도가 느닷없이 밀려오듯 현실이 덮쳐왔다. 아침에 배포된 보도자료에선 내 이름이 지워져 있었고, 출입기자들의 카톡방엔 내 사직 소식이 이미 돌고 있었다.
창밖 풍경에 집중하려는 순간, 진동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부재중 전화쯤이야, 나중에 골라 받으면 그만이었다.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려 했던 계획은 하루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기차는 KTX 열차에 길을 양보하며 느릿느릿 달렸다. 20분 늦어진 서울행. 차창 밖 풍경처럼 차가운 도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누군가의 승진 축하연이 있다.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 한마디가 이토록 어려웠던 적이 있었던가. 20여 년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던 약속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완벽주의가 발목을 잡는다.
여덟 명이 모여 있는 대화방에 송정해수욕장에서의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을 남긴다.
"어제의 부산, 영하의 바다 위에서도 쉼을 구하는 겨울 철새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처럼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날아보려 합니다. 같은 업무든, 아니든... 선후배님들께 감사했습니다."
답장을 기다릴 용기가 없다. 곧바로 대화방을 나온다.
휴대폰은 계속 진동하지만, 손을 대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 슬며시 메신저를 열어본다.
"심온아, 소주 한잔 할까?"
"그럴까"
"너네 동네로 갈게."
업계 동갑 친구의 제안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기다리는 동안 답답한 마음에 부재중 전화 목록을 뒤적여본다.
사직을 앞둔 얼마 전, 한 인터넷 매체 대표와 점심을 함께했다. 그분에게서 하루를 버티는 데 도움이 될 조언들을 들었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올해는 노력해 보겠다고 했지만, 직업 특성상 확답은 피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상대방이 안부도 묻지 않고 곧바로 말을 꺼낸다.
"팀장님, 어디 좋은 데 가시려고… 광고협찬 건 인수인계는 잘하신 거죠?"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