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자리의 독서가

쉼표, 그리고 다섯째 날

by 심온

나는 침대에 누워 아이들이 등교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는 소리까지 기다린다. 마치 숨어있는 도망자처럼. 소변이 마려워도, 목이 말라도 꾹 참는다. 아이들을 향한 익숙한 목소리의 "잘 다녀와"가 들릴 때까지.


사직. 그 두 글자가 혀끝에서 맴돌다 다시 삼켜진다. 아이들도 곧 알아야 할 터인데. 아직은 아니야, 며칠만 더.


고요해진 집 안에서 일상이라는 이름의 의식을 치른다. 화장실 문을 열고, 변기에 앉고, 손을 씻고,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머리를 감는다. 로션을 바르는 것까지는 평소와 같지만, 이제는 왁스를 건너뛴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다.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


어디로 갈까? 도서관이다. 금요일의 친구가 남산도서관을 추천했다. 하지만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귀찮음으로 포기. 도서관이라면 어디든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딸아이와 함께 다니던 그 도서관. 오늘은 혼자다. 자가용으로는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이상하게도 걷고 싶어진다. 나는 운전에 질렸다.


걸어서 30분, 적당하다. 묵직한 발걸음 끝에 도착한 건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차갑고 무심한 벽돌과 콘크리트의 덩어리.


익숙한 풍경들이 스쳐간다. 로비의 안내 데스크, 신착 도서, 베스트셀러 진열대. 1층 어린이실부터 4층 자율학습실까지, 모든 것이 완벽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 여기선 모든 게 질서 정연하다. 내 인생과는 달리.


여기저기 학습실을 들여다본다. 자율학습실, 여성 전용, 남성 전용, 휴게실, 노트북실. 마치 운명의 문을 고르듯 각각을 살펴본다. 여성 전용실은… 그저 실수였다고 하자.


각 공부방에는 시험장 같은 긴장감이 감돈다. 그들은 각자의 꿈을 위해 책과 씨름 중이다. 자격증이든, 영어든, 무엇이든. 문득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배움을 위해 책을 펼친 게 언제였던가.


나는 자율학습실의 문을 살며시 밀어젖힌다.


사람의 마음이란 다 비슷한 걸까? 예상대로 구석자리는 하나도 남김없이 차 있다.


마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하다. 어쩔 수 없이 가운데 빈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위엔 노트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로 잠시 영역을 표시해 둔다.


오늘은 종일 책을 읽으려 한다. 신문기사도, 주간 잡지도, 그 지긋지긋한 보도자료도 아닌, 순수하게 '그냥 책'을 읽고 싶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아래층으로 향한다.


종합열람실의 풍경은 묘하게도 평화롭다. 책상마다 고개 숙인 사람들이 앉아있다. 노트북과 휴대폰이 아닌, 종이를 뒤적이는 이들로 가득하다.


이십 대 젊은이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모두가 책이라는 마법에 걸린 듯하다. 이상하게도 이 광경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딸아이도 이런 마법에 빠져있었다. 일주일에 일곱 권으로도 모자라 내 대출증까지 빌려달라던 녀석. 스무 권의 책을 일주일 만에 삼키던 그 탐욕스러운 독서광. 그땐 그저 귀찮기만 했는데.


딸은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 누군가에게서 선물 받은 책은 목차만 훑어보고 건네줘도 지금도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교양서 코너는 흘긋 보고 지나친다. 이젠 그런 답들이 좀 지겨우니까. 소설 코너에서 발걸음이 멎는다. 일본문학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무라카미 하루키. 한때는 그의 책이 내 삶의 답이었다. 몇 권을 뽑아 들고 구석 소파로 향한다.


네 귀퉁이 중 마지막 남은 자리, 딱 맞는 은신처다. 소파의 맞은편 귀퉁이에는 연세 지긋한 노인이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다.


책을 펼치고, 한 장, 두 장을 읽어 나간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예전처럼 활자가 춤추지 않는다. 무라카미의 문장들은 더 이상 나를 위로하지 못한다.


책을 원래 자리에 밀어 넣는다. 무라카미는 일단 그만.


예닐곱 권의 책을 쌓아둔다. 첫 문장부터 막히면 다음으로, 두 번째 페이지에서 졸리면 또 다음으로. 이렇게 도서관의 평화를 어지럽히다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온다.


기욤 뮈소의 『사랑하기 때문에』. 고(故) 유재하의 익숙한 노래 제목에 이끌려 뽑아 들었다. 진부한 제목이지만, 묘하게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페이지는 쉼 없이 넘어간다. 나는 오후를 통째로 바쳐 이 책을 읽기로 다짐한다.


실수와 절망이 빚어낸 주인공은 결국 노숙자가 된다. 그리움이란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는 그를 보며 낯선 통증이 밀려온다. 작가는 사랑과 삶을 이야기하지만, 내 눈에는 상실과 새로움 사이의 검은 구멍만이 아른거린다.


결말이 궁금해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새 비행기 안에서 SF 장르로 방향을 틀고 있다. 이게 뭐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200페이지를 넘길 즈음 무심코 시계를 본다. 100페이지에 한 시간씩. 마치 인생의 속도를 재듯 무의미한 계산을 해본다.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


배고픔이 책장을 재촉한다.


허망한 숫자들을 더하고 빼는 사이, 창밖은 벌써 검은 잉크를 쏟아붓고 있다.


속이 쓰리다. 점심의 라면 국물 탓일까. 왜 분식은 다 매운맛인 건지. 아 참, 어제도 마셨지.


매점의 순두부찌개가 눈에 들어온다. '그나마' 지갑이 덜 아프다는 게 유일한 위안.


나는 “덜 맵게 해 주세요"라는 근사한 레시피를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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