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아부지

쉼표, 그리고 열 번째 날

by 심온

딱 한 달 전의 일이 발단이었다.


아버지의 생신날, 전화기 너머로 건넨 축하 인사가 문제가 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내뱉은 말. 딸기 농장. 하루 종일 전화 한 통조차 잊고 있다가 저녁 무렵에서야 겨우 생각이 났던 그날.


"오늘은 정신없이 바빴네요. 생신 축하드려요, 아부지."


"그래, 아들아. 바쁘제? 몸은 괜찮나."


"네, 저야 뭐. 항상 멀쩡하죠."


"회사가 힘들 텐데. 건강이 최고데이."


"저기... 아부지. 딸기농장 한번 해볼까 하는데요. 저리로 귀농 대출도 되고, 큰아버지한테 배우면서..."


전화기 너머로 흐르는 침묵이 무겁다. 빠르게 실수를 깨닫는다. 꺼내지 말았어야 할 말이다.


"심온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들리는 것만 같다.


"딸기는... 그게..." 아버지의 말씀에 담긴 걱정이 가슴을 후벼 판다.


유명 대기업의 팀장자리. 아버지의 자랑거리였던 아들이 갑자기 꺼낸 귀농 이야기에 아버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내 아들이라며 자랑하시면서도, 내가 힘들까 봐 안절부절못하시는 그 마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술기운 때문이었나.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꺼냈을까. 마음이 너무 지쳐 아버지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었던 걸까.


더구나 그날이 아버지의 생신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생신날까지 굳이 그런 걱정을 끼쳐드릴 필요가 있었을까. 술기운에 빼앗긴 이성이 원망스럽다.


평소엔 "괜찮아요", "별일 없어요", "저야 건강하죠" 같은 짧은 대답으로만 끝내던 통화를. 그날은 왜 하필 다정한 아들인 척 긴 이야기를 하려 했던 걸까.


긴 시골교회 목회 생활을 은퇴하고야 마련한 지방 도시의 1억이 채 안되는 아파트 한 채가 재산의 전부인 부모님. 자식에게 더 해주지 못해 늘 미안해하시는 분들. 이제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 내가, 하필이면 왜 그런 말을 꺼냈을까.


후회스럽다.




여전히 회사를 그만뒀다는 말은 꺼내지 못한 채, 도서관을 나와 언제나처럼 단골집으로 향한다. 순대국밥과 소주 한 병. 이게 내가 차릴 수 있는 최선의 만찬이다.


휴대폰이 울린다. 아버지다. 한 번의 진동으로 끊겨야 할 전화가 세 번, 네 번, 다섯 번째까지 이어진다.


평소 아버지는 전화를 걸자마자 끊으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짜증이 났었다. 혹시라도 바쁜데 방해될까 봐 일부러 부재중 전화를 남기시는 배려였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그런 아버지가 오늘은 전화를 끊지 않으신다. 기어이 내 목소리를 지금 이 순간 들으시려는 모양이다. 국밥은 거의 다 비웠다. 한숨과 함께 헛기침을 내뱉어 죄책감을 감춘다. 이번엔 밝고 묵직하고 씩씩하게.


"네, 아부지."


"밥은 먹었나... 몸은 건강하나... 건강이 제일 중요하데이... 민종이는 학교 정해졌고?... 기타는 계속 친다던?... 교복값 하라고 돈 좀 보낸데이... 끊는다. 건강해레이."


거짓말이 입안에서 녹아내린다. 기자들과의 식사라니. 순대국밥과 소주 한 병뿐인 이 자리가 무색하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아버지의 진짜 의도를 깨달았다. 그저 내가 무사한지 목소리로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뿐.


교복값은 단순한 핑계였다. 한 달 동안 전화 한 통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졌다. 하긴, 아직 내 목소리는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남은 밥알을 긁어 비워낼 무렵, 통장에 찍힌 10만 원의 입금 알림이 가슴을 파고든다. 민종이 교복값은 괜찮다고 했건만, 아버지는 또 이렇게.


갑자기 국물이 목구멍에서 멈춘다. 무언가가 차올라 더는 삼키지 못한다. 살며시 냅킨을 들어 눈가를 닦는다. 아무도 보지 않았기를.


고개를 숙인 채 카드를 내밀고, '잘 먹었습니다'라는 의례적인 인사조차 생략한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지갑을 외투 안주머니에 밀어 넣는다.


'하, 교복값이라니... 이제 와서 무슨... 10만 원으로 뭘 사라고...'


시야가 흐려진다. 전자담배를 꺼내 물어보지만, 연기는 그저 허공으로 새어나간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때리지만, 뜨거운 것이 자꾸만 눈가를 적신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식당 앞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어깨를 떤다. 모자를 깊이 눌러쓴다.


"젠장... 이런 젠장..."

이전 06화구석자리의 독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