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의 변명

by 심온

나는 또다시 도망을 꿈꾸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끝없는 도주의 갈망이 내 영혼에 뿌리내린 것은.


차갑게 벗겨보면, 도전이라 포장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 도망에 불과했다. 우스꽝스러운 자기기만의 연속이었을 뿐. 새로운 직장, 새로운 도시, 새로운 관계—모두 '도전'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밤이면 그 가면은 벗겨지고 거울 속에는 도망자의 얼굴만이 남는다.


도망의 결심을 단단히 하는 데는 알코올이 제격이다. 매일 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쓰디쓴 액체와 함께, 나는 조금씩 현실에서 멀어진다. 담배 연기 사이로 내뱉는 한숨은 도망의 의지를 다지는 의식과도 같다. 나는 스스로를 아무도 찾지 못할 동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첫 잔은 위안이 되지만, 마지막 잔은 언제나 자기혐오로 끝난다. 그 사이 무수한 잔들이 만들어내는 착각의 무지개 아래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를 뿐이다.


가끔 희망이란 것이 불쑥 고개를 들 때면, 마치 독을 품은 꽃처럼 아름답지만 위험한 그것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희망은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고, 거의 모든 약속을 저버리는 사기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기꾼의 달콤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내가 욕망하던 것을 단 한 번이라도 움켜쥔 적이 있었던가? 손에 쥐는 순간 모래처럼 흩어져버리는 그 모든 꿈들.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사랑받고 싶었던 욕망, 안정을 갈구했던 불안한 영혼—모두가 내게는 너무 먼 곳에 있는 별들 같았다.


나의 욕심은 도대체 어느 지하실에 갇혀 있기에 한숨만이 그 흔적을 드러내는 걸까? 그 욕심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질까 두려워하는 걸까? 진정한 자유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끝까지 쫓는 것인지—나는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세상에 잊히길 갈망하면서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길 바라는 이 모순된 마음 사이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이름 모를 기차역에서 흐릿한 얼굴의 승객들 사이로 사라지고 싶으면서도, 누군가는 내 빈자리를 알아차려 주길 바라는 이 이중적인 마음.


희망이란 것이 결국 욕심으로 부패해 후회라는 썩은 열매만 남긴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또다시 그 씨앗을 심는다. 매일 밤 술잔에 침전되는 후회의 찌꺼기를 들이켜면서도, 아침이면 또 다른 희망의 씨앗을 품에 안는다.


외딴섬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을 갈망하면서도, 누군가—그 모호한 '누군가'—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길 바라는 이 아이러니한 마음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는다. 도망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다른 시작? 아니면 더 깊은 심연?


면접장에서 묻는 잦은 이직 이유를 번듯하게 포장해 보지만, "전부 다 도망이었습니다"라는 냉소적 진실이 입술 끝에서 맴돌며 위태롭게 균형을 유지한다. '성장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라는 말 뒤에 숨겨진, '그곳에서는 더 이상 숨 쉴 수 없었습니다'라는 진실.


다만 한 가지, 내가 확신하는 것이 있다. 이 끝없는 도망 속에서도 어쩌면 나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 도망과 도전 사이의 경계가 때로는 희미해진다는 것.


진정한 도망의 끝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다. 도망자의 고백, 혹은 도전자의 참회록.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걸어온 길의 흔적들을 담아내고 싶다.


그때까지는 나를 찾아보려 한다. 거울 속에서, 타인의 눈빛 속에서, 잊힌 꿈들 속에서. 이 차가운 가을이 지나기 전에. 그리고 아마도, 지나고 나면. 나는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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